1장 정치 비평과 입체주의 미술

by 승현

우리는 앞서 마법 같은 일을 경험했다. 말조차 통하지 않을 것 같았던 상대가 이해되는 체험을 했다. 간첩인 줄 알았던 진보 진영 정치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거시적인 시각에 더욱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러웠던 감정은 존중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차이가 존재했다. 바로 상대의 입장을 들어봤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우리는 상대의 의견을 잘 몰랐기 때문에 상대를 간첩으로까지 오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어딘가 허무해진다.


그러나 너무 허무해할 필요는 없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가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존재로 보이면, 굳이 이들을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쉽게 들진 않으니까. 북한이 주적이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은 분명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이들의 입장은 들어 볼 필요도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지사지는 분명 쉽지 않은 행동이다. 작은 행동이라도 어려울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기어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행동은 훌륭하다.


이는 서로 다른 두 입장의 감정적 거리를 좁힌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판단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담보하는 방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하나의 사안을 다각도로 조명하면, 한 사람의 시각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보기 힘든 여러 면들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즉 오류의 가능성을 아주 작게나마라도 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입장에 견고함을 더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훈련이 정치 비평의, 아니 정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이를 핵심의 위치까지 올려놓는다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경청한다는 단순한 과정에 핵심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실 정치의 본질과 맞닿아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정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란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갈등이라는 단어가 거창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다툼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연인끼리의 다툼 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이 고비들을 잘 넘긴 사람들은 장기 연애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연애의 고수들에게 묻고 싶다. 다툼을 해결하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바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즉,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솔직하면서도 부드럽게 털어놓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의 사연을 헤아리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입장이 어긋났는지 원인을 정확하게 짚을 수 있다. 제대로 짚었다면 올바른 해결 방안 또는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


정치에서의 갈등도 동일하다. 갈등의 규모만 다를 뿐이다. 연인 사이에서 5,000만 국민 사이로. 따라서 갈등 해결의 원리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역시 각 진영 또는 주체들의 입장을 경청해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안을 면밀히 이해하고 나면, 자연스레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정치나 비평을 잘할 수 있는 비결, 또는 본인의 시각을 예리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은 바로 이 갈등이라는 정치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안을 판단할 때면 꼭 다양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그리고 이들을 절충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꽤나 괜찮은,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입장을 갖출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끄덕일 수 있는 그런 입장을 말이다. 이는 사안의 표면뿐만 아니라 쉽게 볼 수 없는 이면을, 앞면뿐만 아니라 그림자 진 뒷면을, 왼쪽뿐만 아니라 오른쪽을, 위쪽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잘 보이는 곳뿐만 아니라 구석까지 모든 것을 살피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다음의 그림을 살펴보자.



<도라 마르의 초상>, 1937, 프랑스 피카소미술관 소장.


작품 속 여성은 분명 옆을 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반대편 얼굴까지 보인다. 옷도 마찬가지다. 정면의 모습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옆모습도 보인다.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을 구현해 낸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어떤가?


<오르타데산트후안>, 1909, 뉴욕현대미술관(MoMA) 소장.


언덕 위에 지어진 마을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언덕도 보이고 집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집이 어딘가 이상하다. 어떤 집은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점에서, 또 다른 집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묘사되었다. 서로 다른 시점에서 포착된 대상의 모습들이 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작품 모두 동일한 작가가 그렸다. 그의 이름은 피카소(1881~1973)이다. 나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정치를 떠올린다. 상기한 정치 비평의 본질이 자연스레 오버랩되지 않는가? ‘모든 것을 살피고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작업’… 이 정도면 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을 들어보며 사안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일. 여러 시점에서 포착된 대상의 모습들을 한 장 위에 담아내는 일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분명 닮아 있다. 전자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낸 미술 사조가 입체주의(cubism)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갑자기 정치랑 미술을 연결하다니. 어색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표면적인 모습만 비슷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들이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피카소는 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누군가는 생물학적으로 접근한다. 이들은 그에게 사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한 거리감이 일반인보다 왜곡되어 있으므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피카소의 천재성에서 창의력을 찾는다. 피카소는 입체주의적 경향에 주목할 정도로 훌륭한 안목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주도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 좋다. 분명히 이런 요인들이 모여 피카소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대나 지리적 위치 같은 구조적 요인이 우리가 아는 피카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카소가 만약 시대만 다르게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원시 시대나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입체주의를 이끌 수 있었을까?


인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부터 벗어나 인간으로 초점을 옮겨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이런 인간 이성과 존엄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 덕분에 산업혁명과 자유주의도 가능했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건물들과 풍족해지는 생활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인본주의는 도시의 시커멓고 매캐한 공기와 아동을 포함한 노동자 착취,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제국주의라는 그림자 또한 제 손으로 드리웠다. 딱 이 시점에서 미술계도 종교와 왕실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 기존의 아카데미즘에 반발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사진기까지 개발되며 작가들은 미술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사진기는 우리보다 훌륭한 그림을 압도적으로 빠르게 그려내는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렇게 미술계는 세상의 재현에서 작가의 표현으로 나아갔다. 실제와 비슷한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소재도 신과 귀족에서 자연과 서민으로 옮겨 갔다. 눈에 빛이 맺히는 대로 그려내는 인상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나 마네의 <올랭피아> 같은 대작들이 쏟아졌다.


(왼)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오) 마네, <올랭피아>, 1863, 오르세 미술관 소장.


특히 인상주의 그림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이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간만 달리 하여 동일한 대상을 그렸는데, 빛의 세기와 방향 때문에 서로 다른 그림 같았다는 것이다. 후기 인상주의자이면서 현대미술을 발아시켰다고 평가받는 세잔(1839~1906)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뭐지? 대체 우리는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아무리 빛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본질은 무엇일까?’1)


모네, <건초더미> 연작, 1890-1891, 시카고 미술관 소장.


그는 결국 나무를 원기둥으로, 집을 직육면체로 그리는 등 모든 대상에서 도형이라는 형태적 본질을 찾아냈다. 빛에도 변하지 않는 그것 말이다. 그리고 피카소가 1906년 파리의 한 전시에서 세잔의 이런 그림들을 접하며 입체주의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그저 단발적인 계기가 아니다. 세잔은 실제로 피카소에게 엄청난 영향을 줬다. 그가 세잔의 작품을 수집했다는 점과 세잔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은 세잔에 대한 그의 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2)


(왼) 세잔, <몽 생 빅투아르 산>, 1887, 코톨드 갤러리 소장. (오) 세잔, <몽 생 빅투아르 산>, 1895-1899, 볼트모어 뮤지엄 아트 소장.
세잔, <몽 생 빅투아르 산>, 1902-1904,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이처럼 당시의 시대적 맥락은 미술계가 본질에 천착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다시 질문해보자. 피카소가 만약 시대만 다르게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원시 시대나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입체주의를 이끌 수 있었을까? 나는 시대가 달랐다면 피카소의 천재성이 다른 방식으로 발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시대를 타고나지 못해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피카소는 본질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심지어 그는 이를 선봉에서 주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작품들을 보자. 이들은 정치의 본질과 분명 포개어졌다.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미술의 본질과 정치의 본질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바로 입체주의였다.



1)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9p.

2) 한국일보, <'기하학으로 그린 자연'... 현대 풍경화 뿌리에 폴 세잔이 있었다>, 양정무의 미술 읽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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