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감기

by 둘리

시끄럽게 울리는 매미 소리에 지쳐 그 싫증마저 어느샌가 무감각해질 때쯤, 비로소 한 여름이 찾아왔다.


잔잔하게 옷깃을 들추는 선풍기 바람에 더 이상 벗겨낼 살가죽도 남아있질 않은 것만 같았다. 간간이 생각나던 진한 보리차조차 내 발 밑에서 애꿏은 이슬만 흘리며 갈증만 더 태웠다. 뜨겁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그 어느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덩그러니 놓인 갈색물의 미지근함이 내 목구멍만 더 아쉽게 만들 거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인걸까. 자포자기한 내 갈증마저 이 여름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녹나무들이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되어가고 있을 때쯤 내장 깊숙히 울분이 올라왔다. 기껏 밀려온 바람 조차 나를 더 미지근하게 만들 뿐, 가라앉히진 못했다. 아무 걱정없이 온 살갗이 뒤집어지도록 여름을 향유했던, 조그만했던 나의 미숙함도 여름 저 어딘가에 때 묻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인화된 사진에 두터워진 손을 아무리 문질러봐도 그 여름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저 때 아닌 소나기에 잔뜩 기대했던 소풍가방을 놓아주는 그 아쉬움이 그리웠던 걸지도 모른다.


오후엔 예기치 않은 비가 내렸다. 지면을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은하게 퍼지는 흙 내음이 나를 먼저 알아차리게 했다. 시리고 닳는 추위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여전히 무거운 공기는 나를 더 얕게 만들었다. 오전의 나의 울분도 사그라질 무렵, 방안의 남아있는 낮의 무더위도 점차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모든 기억이 공기중에 산개되었을 때쯤 거실 저 멀리 새어나오는 티비 소리는 나를 더 흐리게 만들었다.


티비 속 재잘거림이 나의 어릴 적 자장가로 남아있을 때쯤 모든 기억은 물밀 듯이 흐릿해져가는 듯 했다. 무더웠던 여름 날에 선잠에 들었던 기억도, 장롱 속 꿉한 나프탈렌 냄새도, 비오는 날이면 이불속에 베겨버린 빗내음도 이제는 작고 어릴 적 그 기억 속에 영원한 허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신 만지질 못할 한 파도의 거품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게 기다려왔던 이 여름, 한여름의 감기라도 걸린 듯 나는 잔기침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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