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의 <카오스 멍키> 리뷰
나의 최애 미드 <실리콘 밸리>! (한국에서는 왓챠 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 안그래도 재미있는 <실리콘 밸리>를 100배 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이 있다. 바로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즈의 <카오스 멍키>를 읽고 보는 것이다.
사실 <카오스 멍키>는 무려 650페이지가 넘는 꽤나 두꺼운 책이다. 내용 또한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 퀀트매매(네?)와 애드테크(네??)와 백엔드개발(네???)과 시리즈B와 베스팅(네에???)에 대해 한참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페이스북에 당도하기 때문에, 이 길고 긴 이야기 속에서 몇몇 독자가 중도에 길을 잃고 헤맨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기들이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라고 고백하듯, 한 챕터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흡사 미드와 같은 흡입력을 갖고 있는 책이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의 거침없는 폭로와 유머감각이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의 캐릭터가 머릿속에 뚜렷하게 자리잡게 되는데, 저자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묘사해 보자면 — 스스로는 매사 시니컬한데도 늘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고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으로 거친 유머를 떠들어대는 동아리 선배 같은 느낌이다. 동기 선배들한테 ‘사실은 쟤가 정말 똑똑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그런데 진짜 그렇게 똑똑한거면 대체 왜 저런 꼴로 엉망으로 지내는지 이해가 안가는, 대체 저런 사람이랑 누가 사귀나 싶은데 꽤 괜찮은 여자들하고 계속 잘도 사귀는 선배 말이다. 게다가 다른 선배들보다 취직도 잘해서, 대체 저 선배는 비결이 뭐지? 하고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느 동아리에서나 한 명쯤 볼 수 있는 그런 선배. (쓰고 보니 넘 심했나... 여튼.)
시니컬한 저자를 시니컬하게 소개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야겠다.
‘실리콘밸리에 대해 날 것 그대로를 기록했다’는 소개에 걸맞게 이 책은 질서정연하게 성공 비결을 나열해주는 책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마치 원탑 주인공이 7년의 세월 동안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는 소설책을 읽는 것과 가까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책 겉표지에는 ‘영화 같은 실화’라는 카피가 붙어 있다. 정말 그렇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자세한 묘사와 가감없는 표현들 덕분에 독자들에게 한 신생 회사의 생로병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스타트업의 성공 비결이나 조직 문화를 분석한 책을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생생함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피로가 몰려온다. 마치 내가 간떨리는 창업을 한 후,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똥을 치우는 심정으로 주말도 없이 악전고투하며 지내다, 결국 어떻게든 회사를 더 비싼 값에 팔기 위해 좌불안석으로 가슴졸이다 드디어 막 탈출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저자는 우리를 자신의 스토리에 몰입시킨다.
시종일관 쿨하고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는 저자는, 교조적인 태도를 절대적으로 지양하며 특유의 해학적인 어조로 스스로의 실수와 실패를 희화화하는데 사실 그 말투에 속아 간과하기엔 꽤나 배울 점이 많다. 개인적으로 메모해두고 싶은 이 ‘행간 속 조언’을 다섯 가지 정도로 꼽아보았다.
다양한 시도만이 기회로 연결된다. 요즘처럼 변화무쌍한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열심히 예측을 해본다고 한들 완벽하게 계획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또 기업들은 망설이고 주저하다 시도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저자의 경험에 비춰 본다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지체하지 말고 시도해야 한다. 즉흥적으로 애드케미에 이력서를 보낸 것부터 시작해, Y콤비네이터의 웹사이트에서 지원 공고를 보자마자 이틀만에 지원서를 내고, 몇 차례의 데모데이를 거쳐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결국엔 트위터에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회사를 넘기기까지 저자는 그 어떤 순간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매 순간이 모두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시도는 기회를 얻을 확률 또한 높여준다. 반대로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건? 비즈니스 세상에서는 사망선고와 다름 없다.
완벽보다 완성이 낫다.
제품을 지나치게 빨리 출시해서 죽어간 회사의 수는 극히 적다.
상황이 나빠봐야 (애플이 아이폰 맵 앱의 첫 버전에서 겪었듯) 창피한 꼴을 한번 겪을 뿐이다. 그러나 출시할 용기가 없어서 죽어가거나 지레짐작, 주저, 내부적 우유부단함의 혼수상태에 빠진 회사는 무수히 많다.
(p394)
페이스북에서도 지체하지 않는 빠른 실행력을 찬양하는데, 이는 페이스북 Credo의 구절들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완벽보다 완성이 더 낫다
빠르게 움직이고 틀을 깨부숴라!
두번째는,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려운 원칙의 대명사 격이라 할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선택과 집중이란, 우아하고 지적으로 사안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라기 보다 ‘광적인 집중력’에 가깝다. 저자는 성공적인 스타트업 창업자를 결정하는 두 가지 성향 중 첫째로 ‘삶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 가지 일에만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며 집중하는 능력’을 꼽는다. (p227~8)
저자는 지성이나 기술적 역량, 독특한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시장에 대한 비전이 아닌, 바로 이 집중력 (goal-oriented된 태도)이 스타트업 창업의 필수 덕목이라고 책의 여러 부분에서 강조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은 선택된 것 외엔 무심히 내팽개친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는데 직업적으로 성공한 인물들의 라이프 스토리에서 흔히 듣듯이 주로 가정을 내팽개 치는 경우가 많고, 동료들과의 화합이나 의리도 흔히 내팽개쳐지는 것 중 하나다. 저자 또한 ‘페이스북에 내 삶을 모두 바치느라’ ‘두 아이를 내팽개쳤고, 두 여성의 소중한 사랑을 걷어찼고, 두 척의 보트를 방치했고, 회사 일에 헌신하느라 취미나 여가생활도 전무했다’(p 602)고 적는다.
어느 쪽이 옳은 삶인지는 모르겠다. 여튼, 확실한 건 당신이 선택한 그 우선순위가 당신의 미래가 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선택도 하지 않고 집중도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미래를 되는대로 흘러가게 놔둔다.
지금도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
성공적인 창업자의 두 번째 덕목으로 저자는 ‘무한한 양의 똥더미를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능력’(p229)을 꼽는다. 저자는 이 능력에 대해 묘사할 때, 괄호를 통해 ‘이것을 인내, 참을성, 또 다른 뭔가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부연했으나 한국어에는 사실 아주 적확한 표현이 있다. ‘맷집’이라고. 아무리 밟히고 폭풍우를 맞아도 끝없이 다시 일어나는 한 포기 풀처럼 끈질기게 버티고 어떻게든 끝까지 해내려는 에너지 말이다.
이 에너지는 타고난 기질일수도 혹은 앙심, 복수심, 적으로부터의 생존 위협이나 승부욕 등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투지와 동기부여다. 저자 또한 이 투지를 에너지 삼아 애드그로크가 위기에 처한 순간 (이를 테면, 전 직장 애드케미에서 소송을 걸어왔을 때) 기를 쓰고 그 위기를 빠져나온다.
저자의 끈질김은 위기의 순간에만 빛을 발한 것이 아니다. 기회를 포착할 때도 그의 집요함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예를 들어, 그는 Y콤비네이터에서의 강연에서건 페이스북 신입사원 교육에서건 늘 맨 앞 줄에 앉는다.
p113 나는 연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늘 맨 앞줄에 앉았다.
p350 항상 그렇듯 나는 맨 앞줄, 강사 코앞에 앉았다. 모든 표정 변화를 낱낱이 살피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저자는 늘 미팅 전, 만나게 될 상대를 ‘링크드인에서 스토킹’한다. ‘어떤 미팅에 참석하든 간에, 상대에 관해 사소한 사항까지도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p244)
저자는 광적인 집중력과 달리 이 끈질김은 학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썼지만, 이쯤되면 이걸 학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 봐야할지 좀 난처해진다.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써보면, 이것저것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는 능력과 거기서 교훈을 얻고 핵심적인 실패(혹은 성공)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후자다. 전자는, 스타트업을 시도하는 많은 이들이 이미 갖추고 있을 공산이 큰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자의 핵심은 ‘자기 객관화’이고 이건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 합리화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정말로 자신이 어떤 점에서 부족했는지 해부해봐야 하며 자신이 오랜 기간 환상을 갖고 있던 인물, 혹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비전에 대해서도 그 콩깍지를 벗어던지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본다는 것이 억지로 훈련을 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업계에서 Don’t fall in love with your idea라는 말을 종종 한다. 스타트업 업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현명한 결정(애드그로크를 트위터에 매각하자!)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 준 자기 객관화 능력을 발휘해 자신이 더 노련했더라면 그 매각 딜을 어떻게 이끌었을지 솔직하게 고백한다. (p342 그 계약에 있어 나는 완전히 바보멍청이였고, 그 계약은 똑똑한 계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허세와 무지몽매를 통해서 두게 된 좋지 못한 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며 자기 객관화 능력 어필에 정점을 찍는다.
p344 다시 돌아보면, 애드그로크는 사실 페이스북(그리고 친구들의 경우에는 트위터)에 들어가기 위한 길고 스트레스가 심한 입사 면접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 애드그로크를 ‘매각’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애드그로크는 우리의 경제적 입지를 높여줄 직장에, 이런 방법이 아니었더라면 들어갈 수 없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레버리지일 뿐이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책의 초반, 이미 저자는 월스트리트 엘리트 집단의 대명사, 골드만삭스를 떠나 당시로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던 영역인 애드테크 업계에 몸담겠다는 대담한 결정을 한다. 그렇게 완전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실리콘밸리에 합류한 후에도 그는 대범한 리스크 테이킹을 이어간다. 저자가 애드테크 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애드케미라는 회사를 박차고 나와 애드그로크라는 스타트업 차리는 것은 물론, 그렇게 일군 회사를 더 좋은 조건에 팔기 위해 트위터와 페이스북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를 한다. 모든 계약이 날아갈 수도 있는 리스크를 지고 말이다.
가만있자, 그런데 이걸 리스크 테이킹이라고 해야할지 조금 의문이 생기긴 한다. 저자가 이처럼 리스크 테이킹을 했던 이유는, ‘골드만삭스와 자본주의는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인데 반해 ‘자본주의 격랑에서 나름 격리되어 있고 외떨어진 IT업계야말로 앞으로 다가올 붕괴의 도미노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으리라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p49) 애드케미를 박차고 나온 이유도 회사에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p65~8)
리스크 테이킹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판돈을 크게 걸 수 있는 용감함이나 패기가 있다는 뜻일까? 리스크 테이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닌,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비전이 아닐까? 지금은 리스크 테이킹처럼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더 안전한 길일 수도 있다.스타트업 CEO든, 대기업의 경영진이든, 혹은 개인이든, 비지니스 측면에서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철저히 ‘미래’여야 한다. 당장의 번거로움이나 고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의 <초격차>에 보면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배울 수 있다.)
이토록 캐릭터 강한 저자의 이야기를 655페이지 동안이나 영차영차 따라가다 보면, 역시 스타트업의 성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창업자들의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초반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p74 현명한 초기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YC는 우리가 지닌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보다는 팀 자체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디어는 단지 팀의 자질을 판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아이디어 자체에는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저자는 뒤이어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할 팀이 없는 아이디어는 똥구멍이나 소신과 같다.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어느 현인은 말했다. 내 아이디어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남이 도용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남들에게 먹히도록 설득해야 한다.’라는 팩폭을 시전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모 스타트업 대표의 강연 후기글에서 본 내용이 생각났다. 최근 거액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에게 어떤 비전을 줬냐는 청중의 질문에 우리가 먼저 투자를 제안한 것이 아니고 투자자들이 먼저 찾아왔으며 그들에게 우리에게서 어떤 비전을 봤냐고 역으로 물으니 오히려 그들은 우리 비즈니스 모델은 관심 없고 당신 같은 사람과는 뭐라도 성공시킬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이미 투자자들은 실리콘밸리의 진리를 알고 있는 거다.
<카오스 멍키>는 다 읽고 나서도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책이다. 책에 나왔던 인물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계속 궁금해 하게 만든다. 저자는 어디선가 계속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만 같다.
책에서는 한 단계의 성공이 다음 단계의 성공 또한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라고 한다. 페이스북은 누구보다 성공한 IT 기업이 되었음에도 이 진리를 깊이 새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저자는 페이스북을 마치 ‘매일매일이 독립기념일의 미국 같았다’고 표현했다.
p456 우리가 페이스북을 무찌를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분명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것이다. “변화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낼 필요조차 없을 만큼 머릿속 깊숙이 박아두어야 한다.
우리의 여정은 단 1퍼센트만 끝났을 뿐이다.
나는 몇 퍼센트 쯤 왔을까? 1%라면 좀 기운 빠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거의 다왔단 소식 보다는 아직 갈 길이 멀단 소식이 더 반가울 것 같다.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 앞으로 남은 여정에, <카오스 멍키>의 조언들이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