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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비미 Jun 04. 2024

그들은 무엇을 관찰했고, 슬퍼했을까?

애가 닳아버린 철학자와 작가 그리고 나에 관한 이야기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당신(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당신과 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면 어느 쪽이 진리 거나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신(자신)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당신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당신은 성공을 한 것일까? 실패를 한 것일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한 개인의 모든 선택은 개인 그 자체에게만 온전하게 유의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타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타자를 백 프로 내 마음처럼 움직일 수 없다. 만약 그런 상태를 영원히 원한다면 우리는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자에 흡수되어 버리게 된다.


이제는 니체의 책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도전을 한 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이었다. 책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두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여기서 체크. 대중에게 내려갔던 차라투스트라가 죽은 시체를 메고 산에 들어가 머리만은 짐승에게 뜯겨먹지 말라고 나무구멍에 머리를 덮어놓고 새로운 여정을 떠난 부분에 체크 표시를 더했다. 그리고는 그 지점에서 니체가 얼마나 슬펐을지 생각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모든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차라투스트라의 마음의 간절함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들고 가던 시체는 왜 한 구였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수많은 대중들 사이에 초인의 경지에 가보려고 도전하려던 청년 같은 사람. 그러나 끝내 고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자신과 가장 닮았던 타자.


타자에게 강제로 주체성을 부여할 수 없기에 다만 시체여도 머리만은 꼭꼭 숨겨주던 차라투스트라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새로운 길을 떠나야만 했다는 것을 온 감각으로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고독(솔리튜드)의 길을 향해 나아갔을 것 같다.


최근 읽은 또 하나의 책 기억과 서사(오카마리)에선 나와 동일한 사건을 겪은 타인이라 하여도 같은 기억을 가질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는 타인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겪어도 다르게 해석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타인의 기억을 분유하기 위하여 내셔널리즘을 뛰어넘은 난민적 삶을 살 것을 권한다.


오카마리의 난민, 니체의 초인 둘 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을 꿈꾸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왜 오카마리는 타인의 고통의 분유를 주장하며 니체는 위버맨쉬를 주장했을까? 그럼에도 왜 타인의 삶을 구하거나 마음을 쓰거나 안타까워할까?


그것은 아마 자아와 타자의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는 탈타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존이나 생존의 영역으로 온다면 내 견해로는 탈타자의 경지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타자와의 상호교류 속 자아가 영향을 받는다. 상처받고 안타깝고 기쁘고 화가 난다. 그러니 자신(자아)과 관계 맺는 타자가 최소한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존중해야 자아가 다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레비나스의 견해를 빌려서 해석을 하자면 시간이 타자의 존재로 인하여 유의미해진다면 자신의 과거를 닮은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마치 자신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간절해진다. 이것은 투사이지만 나는 투사도 사랑의 한 형태라고 본다. 타자를 자신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질과 수용이다. 그렇다면 타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특질이다. 처음 특질이란 단어를 들었을 땐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생각을 했는데, 특유의 질감이라고 해석하니 와닿았다. 타인을 만날 땐 타인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질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가 안전하기 위하여 타자를 타자로서 수용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타인을 수용할지는 자신의 목적에 따르면 된다. 진심이나 정성을 다해야 하는 관계라면 다해서, 그렇지 않다면 이용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다.


여전히 간절하고 오해받고 타자의 자유를 존중해주지 못한다. 불온전한 만큼 신의 영역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결국 고독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자아에게 하고 싶은 말임을 깨닫고 부단히 극복하려는 시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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