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간 속에서
“솔직히 지루하지 않나요? 이 삶이 반복된다면 말이에요.”
그래서 도망가고 회피하고 자신과 닮은 이들을 만들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면 과감히 찍어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거 아닌가요?
참 아이러니 하죠? 존재는 사실 그런 지루함을 견디는 자리에서 태어나잖아요.
세상이 흔들릴 때가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일상 한복판에서 말이에요. 미술관에 걸린 수많은 위대한 이름들도 그랬을 거 같아요. 위대함은 찰나의 재능보다는 지루한 날들을 채우며 붓을 들었던 반복 속에서 드러난 거니까요. 가장 친했던 친구를 앗아 간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더 이상 손이 움직이지 않아 입으로라도 물고 그렸던 르누아르도 그래서 이야기가 되었겠죠. 그걸 견디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기 전에 이미 세상에서 지워졌을지도 몰라요.
달리기 할 때면 항상 나오는 오르막길이 있어요. 숨이 차는데도 오르막까지 나오니 정말 아찔해요. 그 구간을 지날 때면 묘하게 항상 흐릿한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아요. 시야에 뿌연 안개처럼 습기가 끼면서 수평선 저 끝에 한 명이 서있는 것 같은 환영이요.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서 있는 한 명의 사람.
그 사람이 저라고 믿어요. 그곳의 저는 정말 환영일 뿐일까요? 언젠간 정말 마주하게 될까요? 저는 왠지 달리기와 같은 인생의 경주를 마치고 나면 결국 그와 만나게 될 거란 확신이 듭니다. 그 사람은 과거로부터 날 보고 있는 아이인지, 미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나보다 성년일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절 꼭 껴안아 줄 것만 같아요.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정말.
“수고했다고.”
시대를 풍미한 작가들의 그림을 보다 보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어요. 그들의 불멸하는 존재성을 예술성과 명성이란 채색으로 타인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었죠. 정확히는 그 그림의 소유자나 그들에게 배운 이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오히려 그들을 인정해 주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의 생이 요약된 작은 설명 조각을 보다 보니 종종 위대한 증명을 받았음에도 마약이나 향락 그리고 사생활로 자신을 스스로 파괴한 이들을 마주한 기분이었어요. 내 안에 솟아오른 이질감의 원천은 타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 줄 때 온전한 만족감이 드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던 거예요. 그건 증명이라는 단어가 말하지 못하는 여전한 공허함의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규명되는 것일까요?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면 정말 존재할 수 있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나라는 존재의 소리가 타인의 소리와 만나 물감처럼 번지고 겹쳐지며, 서로의 빛을 덧입은 제3의 존재로 거듭나는 거 아닐까요? 존재의 살아있음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증명되고 확장될 수 있으니깐요.
존재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다면 0에 수렴하는 숫자라고 말할 저에게도 존재의 살아있음을 유일하게 관찰했던 순간이 이 숲 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명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을 때, 너무나 친근하게도 오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 이젠 스스럼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저는 물속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같은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그건 아주 작은 움직임일 테지만 말아죠.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숲의 희망처럼 조용히 피어나는 섬망의 모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만의 지적의 아카이브요. 여러분들이 자신의 분야를 조용히 축척시켜 온 홀씨 같으면서도 강한 전파력을 가진 사람들 이깐요.
두려운 미래도 우리가 고민하고 사유한 가치로 꽃가루처럼 널리 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마 우리가 살아갈 존재의 정원을 만드는 일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힘드실 겁니다. 그저 견디는 일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들이 바람의 숨결처럼 여러분의 뺨을 스쳐 생채기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만의 결이 눈에 띄기 때문에 여러분을 힘껏 멈춰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그저 당신 자신의 길일지라도 말입니다.
가끔 그 속에 나의 육체에서 영혼도 분리되어 그들의 속삭임에 져버린 듯 나를 붙잡고 멈추게 하려 들 것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생겼음에도 이제 지쳤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으면 합니다. 너의 존재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나도 그들도 모두가 힘겹게도 삶을 꼭 끌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간절한 마음의 추력은 때로 만나야 할 지점을 지나쳐 어긋나게도 하고, 흩어지게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어긋나지고 흩어지게 되는 길을 가는 주체가 내가 되는 순간이 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한 명은 꼭 울어주었으면 합니다. 그 작은 눈물만이 내가 살아온 길의 증명일 테니 말입니다.
아마 그들이 여러분을 잡아 세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름의 초록보다 의미 없음에 우리는 어느새 깊은 애도의 방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앞서 변곡점에서 자기 자신을 벗어버린 고치처럼 스스로를 놓아두고 가려는 사람을 보면 이후 한동안 기억의 집착이 시작되곤 합니다.
그래서 산보다 높고 거대한 폭포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흘리듯, 거대한 물줄기를 토해낼 때 그것은 변해버린 이들을 향한 눈물 같기도 했고, 그 사람들도, 나도 애써 지켜왔던 것들이 기억의 응결처럼 멈추지도 않고, 넘치게도 흘러가 버려서요.
중요한 말을 해보고자 합니다. 존재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일이 당신 그리고 나 자신 안에서부터 태동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일이라는 사실을요. 태동으로부터 시작한 걸음이 멈출 때까지 자신답게 존재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현존이 될 것이며, 오늘날의 현존은 과거가 되어 미래의 당신을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의 시간이 만든 세월 속에서 스스로에게 증명받으시길.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씁니다.
어떤 의미로도 규정되지 않기를.
그것이 너를 만들었던 이들이어도,
네가 사랑했던 이들이어도.
네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힘껏, 끝까지 나아가보기를.
그리고 가끔,
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이
사실을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여 주기를 바랍니다.
너의 세계가 가장 맑고, 가장 화창했음을.
언제나 그들의 무지를
넓고 섬세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되,
너를 해치는 이 앞에선 결연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리고 언젠가 아이였던 모든 아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