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사월아 오늘 퇴근 일찍 해! 갈 데 있어^^]


한바탕 시원한 소나기가 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젖었던 땅이 다 마르진 않았지만, 이게 다 마르고 나면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질 거라고, 한 발 더 가까워질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 의미였다.

혹시나 내가 화를 냈던 것 때문에 기죽어 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한 것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엔 노란 장미를 한 송이 준비했다. 꽃말 같은 건 알지 못했지만, 환한 색깔이 그녀의 미소와 닮아 보여 노란색을 집어 들었다. (후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노란 장미의 꽃말이 '질투와 시기'라고 해서 적잖이 놀랐지만..)


어쨌거나 꽃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는 기분은 평소보다 더 들뜬 기분이었달까, 마치 첫 데이트 인냥 두근거렸고 그 두근거림을 잠시 즐기다 보니 그녀가 도착했다.


"찰스야!"


"응 왔어?"

짧게 인사를 하고, 저만치 그녀가 보일 때부터 등 뒤로 숨겨둔 꽃을 슬쩍 내밀었다.


"헐? 뭐야 웬 꽃? 되게 예쁘다!"

"그냥, 오다 줏었어."


거친 남자 흉내를 내자 이렇게 예쁜 꽃을 어디서 줍냐며 그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내심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사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역시, 나란 남자.'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뭘 어디가, 밥 먹으러 가지. 기대해도 좋아."

"얼마나 맛있는 밥이길래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들어간 곳은 강남 모처의 유명 레스토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따뜻하고 편안한 조명이 가득했으며 그녀가 좋아하던 첼로 선율이 들려왔다.


사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약간 위축되거나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겐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리고 말끔한 복장을 갖춘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찰스야,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음, 그치. 날이지"

"무슨 날인데?"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월이 기분 좋아지는 날."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사월이 기분 쳐져있을까 봐. 엊그제 있었던 일 계속 마음에 담아두거나 기죽어 있거나 그러기 없기야!"


그녀는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주문하자.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여기 코스로 시키면 파스타랑 스테이크랑 맛있는 거 되게 많대! 아, 나 방금 좀 촌스러웠나? 사실 이런데 처음이라..."


멋쩍은 듯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런데 와본 적 있어?"


"응, 한두 번?"

"아... 그래..? 누구랑 왔냐...?"하며 질투심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자 또 그녀가 깔깔 웃었고 그러다 보니 곧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쁘게 플레이팅 된 송이 버섯 애피타이저부터 한우 스테이크, 아이스크림과 타르트 등 다양한 디저트까지, 먹는 내내 감탄사의 연속이었다. 이래서 음식은 비싼 값을 한다는 건가.


음식도 음식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런 자리를 통해서 그녀와 '처음'인 추억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고마워 정말, 오늘 꽃 선물도, 비싸고 좋은 음식도, 찰스가 해준 말도."

"음... 대체로 이런 건 공짜가 아니지 않던가?"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하니 곧 내 볼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찰스 집까지도 데려다 줄 거야!"

그녀의 보답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걷게 된 우리 동네 골목길. 달빛을 맞으며 길을 걷는데 느닷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김찰스!!!"


아, 우리 엄마.


종종 내가 없을 때 와서는 집안 정리를 하고 가시는데, 하필 그녀랑 같이 마주치다니.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하는 사이, 엄마가 눈 앞까지 다가왔다.

"누구야, 이 예쁜 아가씨는?"


"안녕하세요 어머니. 찰스 친구 강사월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오시는 줄 알았으면 저녁은 다음에 먹어도 됐는데... 식사는 하셨어요?"

인사를 나누던 그녀의 모습은 아주 싹싹하고 명랑해 보였다.


"어머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찰스랑 좀 있다 가셔야죠. 다음에 또 뵐게요."


짧은 인사를 마치고, 가겠다는 그녀를 그냥 보내기도, 길에서 마주친 엄마를 남겨두고 그녀를 데려다 주기도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다. 결국엔 빈집에 와 청소만 하다 가는 엄마를 그냥 보낼 수없어, 그녀에게 인사를 해버렸지만.


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며,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던 중에,


"그냥 친구 아니지?"

아무래도 티가 났던 모양인지 엄마가 나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전에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내가 힘들던 모습도 전부 지켜보셨고,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던 것 역시 기억하고 계실 텐데.


왠지 모를 미소를 띠던 우리 엄마. 한동안 심하게 앓던 아들의 나아진 모습이 내심 다행이었던 모양이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 내뱉었던 말을 지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거나, 민망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 끝이 정해져 있는 연애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응.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야."


이런 저런 설명보다는, 그저 좋아한다는 말에 많은 의미를 담아 질문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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