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꾸뻑-


내 고개가 떨어지는데 내가 놀라서 눈이 번쩍 떠졌다.

'어휴. 왜 이렇게 졸리냐.'


점심만 먹고 나면 매일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 탓에 옷을 껴입었더니, 몸이 따뜻해서 그런가. 몸의 여기저기를 비틀고 늘려가며 스트레칭을 하던 중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친구 헤어졌대ㅠ]


지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리는 '남의' 이별 소식.

오늘은 그녀의 친구가 주인공이구나. 퇴근 후, 실연의 상처로 가득한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랬구나, 만나서 잘 위로해주고! 우울한 감정 물들지 말고!]


불과 몇 달 전에, 그러니까 내가 그 이별 소식의 주인공이었을 때 느꼈던 것인데, 사실 이별 직후에 받게 되는 누군가의 '위로'는 마음까지 와 닿기가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위로를 받았으나 (또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힘내 인마,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같은) 그들의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으니.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친구를 만나서 잘 위로해주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 그녀 나름대로 친구의 이별에 공감하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얼마 뒤 우리의 모습을 그 친구를 통해 생각해 볼지도 모르겠고. 그런 류의 생각을 하는데, 곧이어 친구에게도 연락이 왔다.


[야, 니 소개팅 할래?]

[뭔 소리여, 나 여친 있다는 말 못 들었냐ㅋㅋ]

[알지ㅋㅋ 근데 일본 간다며]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미쳤어?]

(실제로는 훨씬 험한 말이었지만.)

[야, 니 전 여친이랑 헤어지고 연애 안 한다고 하더니 결국엔 다시 연애하잖아. 어차피 연애할 거면 오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랑 연애해야지. 니 내일모레 서른이야]


[내가 내일모레 서른 인 거랑 니랑 뭔 상관이야]

(역시 험한 말이었음.)


나는 나름대로 성질을 내고 있었는데,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야 어쨌거나 우리 미용실 디자이너가 니 좋게 봐서 아는 동생 해주고 싶대. 연락처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해]

'하.... 미친놈...'


내가 전에 만나던 그 사람과 헤어진 뒤, 날 가장 걱정해주던 친구였다. 물론 그 걱정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식이어서 전에도 몇 번인가 반강제적인 소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약속을 잡고 나가 보니 친구와 여자가 함께 있는 식의.)


아무리 그래도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건 아니지 않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고 그 좋지 않은 기분으로 오후 시간을 보냈다.


퇴근 후엔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점심 때의 일을 돌이켜봤다. 그 친구는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여자의 연락처를 건네줬을까. 나와 그녀의 '끝이 예약되어 있는 사랑'은 남들이 보기엔 정말 장난같이 보이는 걸까.


우리는 충분히 진지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대가 만족을 하는지 못하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사랑을 있는 힘껏 전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종종 주변에서는, '그럴 거면 왜 만나?', '조금 있으면 헤어질 거라며?' 등의 말이 들려왔다.


기본적으로 누군가 나의 삶이나 가치관, 행동 방식들에 끼어드는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들의 말에 쉽게 흔들리거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나는 그녀를 거짓 없이 사랑하지만, 이별 후 겪게 될 상실감 또한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말처럼 '오래 만날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 이별 따윈 저 뒤편으로 미뤄둔 채 눈앞의 사랑을 열렬히 태우는 게 맞는 것인지.


정답이 분명해 보이지만, 또 함정일 것 같은, 그런 혼란이라고 표현하면 정확하겠다.


'쓸데없는 말을 들어서는...'

생각이 복잡해져 TV를 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친구의 이별을 달래 주러 가고, 내 친구는 아직 오지도 않은 내 이별을 걱정해주는, 기가 막힌 하루가 돼버렸구만. 결국 머릿속을 가득 메운 탁한 생각 때문에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전화하고 싶은데 중요한 얘기하고 있을까 봐. 보고 싶어.]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왔다.

[그래? 그럼 잠깐 나와~]


'헐...? 설마!!!'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걸쳐 신고 단숨에 뛰어 나갔더니, 그녀가 집 앞에 서있었다.


"뭐여! 놀랐잖어!"

깜짝 놀라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그녀가 내게로 와 깃털처럼 안겼다.


저녁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녀의 체온은 무척이나 따뜻하더라.


'역시, 이별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역시 난, 널 사랑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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