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악몽을 꾼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 뭔가 찝찝한 출근길 아침이었다. 보통 꿈자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 오늘따라 영 좋지 않은 기분이 이어졌다. 일을 하면서도 한동안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뭐 할 거야?]

[음..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 하지!?]


큰 상관관계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져 우리가 처음 갔던 동네 치킨집에서 만나자고 했다.(왜 있지 않은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저녁에 술 마셔야지!' 하는 것)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퇴근!


[나 이제 퇴근했어. 어디야 찰스?]

[응 나도 이제 나왔어ㅋㅋ 역 앞에서 봐, 금방 갈게!]


오늘도 역시 그녀가 먼저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난 또 살금살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본래 이런 걸 좋아한다.)


"안녕 이쁜이?"

움찔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귀여웠다.


"얼른 가자, 나 배고파. 오늘 완전 많이 먹을 거야!"

"오늘따라 신나보이네 찰스??"

"당연하지! 사월이 보고 있으면 얼마나 기분 좋아지는데, 대체 언제까지 예쁠 셈이야?"


실제로 그녀는 내 답답한 일상 속에서 몇 안 되는 청량제였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무겁고 끈적거렸던 기분이 그녀를 마주함과 동시에 말끔히 날아가버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끔하게.


그 정도만 하더라도 고마워 죽겠는데, 그녀가 이번에는 선물을 꺼냈다.


"그냥 샀다고? 아 고맙게!"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흠. 내가 진지하게 다시 한 번만 물어볼게. 대체 언제까지 예쁠 셈인 거야? 자꾸 이럴래?"


하루가 마감될 쯤이 돼서야 기분이 완벽하게 좋아졌다. 약간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지나가는 표정 속에 뭐랄까, 고민이라던가 어둠이 끼어 보인다는 것.


"사월아, 근데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아니, 그냥 기분 탓인가.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아냐, 그런 일 없어. 그나저나, 여기도 오랜만이네.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응? 당연하지! 역사적인 날인데!"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 온, 그러니까 내가 그녀에게 절실하고도 간곡한 고백을 하던, 그 치킨집에서 우리의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생각해보니 고백의 장소가 치킨집이었다는 게 볼품없어 보이긴 하지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고백이었으니 뭐.


"찰스는 나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들었어?"

"음, '첫 눈에 반했다.' 이런 것보다는 '이 여자, 느낌 좋다.' 정도 였지 아마?"

" 아 그냥 반했다고 해!!"

(그랬어야 했는데...)


분명 첫 느낌은 '반했다.'보단, '내가 앉은 테이블 앞에서 쭈뼛거리던 아가씨', '나와 같은 공연 티켓을 들고 있던', '우연이 자꾸 겹치는',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 정도였기 때문에 초면임에도 그 아가씨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공연 저도 보러 가는데.'라고 했던, 우리의 인연을 여는 첫 대사. 그때 용기 내지 못했더라면, 지금 그녀와 함께 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행복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테지.


아마 지금도 난 매일 저녁 술을 마시고 있었을 거다. 우연으로 시작된 인연을 조금 더 잇고 싶어 그녀에게 바로 이 자리에서 고백했었다. 충동적으로 하게 된 고백인건 사실이지만, 아마 그녀가 떠난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백을 했을 거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누구나 자신들의 사랑은 극적이고 환상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우리에게 찾아온 분홍빛 우연이 아주 아주 특별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과거를 회상하기엔 고작 두 달전일 뿐이고,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시작을 떠올리는 일은 매우 즐거웠다.


"고마워. 사월이 너 아니었으면 아주 오랫동안 이런 감정 못 느꼈을지도 몰라. 어쩌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르고."

"에이, 나 아니면 뭐 여자가 없냐! 뻥치시네!"

"아냐 아냐, 난 정말 연애하고 싶지 않았거든. 너라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거야. 고마워 일으켜줘서. 정말이야."


'네가 떠나더라도 나 다시 주저앉지 않을 거야.

너한테 받았던 마음들 품고 있을게.

덕분에 꿈같은 사랑했다고,

덕분에 아름다운 기억 만들었다고 생각할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그때에 내 마음이

여전히 뜨거울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거기서 일 마치고 돌아올 때쯤에도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면. 그땐...'


이 생각은 말로 꺼내지 않았다.

이 자리가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아직은 그녀가 내 곁에 있고,

아직은 내 심장이 그녀에게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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