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음... 글쎄. 뭐할까?"
"뭐 먹고 싶은 건?"
"음.. 그러게. 뭐 먹지?"
여러모로 우유부단한 내 성격 탓에 언제나 우리의 데이트는 그녀의 의견대로 움직이기 일쑤였다. 어느 날 나와의 데이트가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이번 주에 등산 어때?! 등산! 단풍놀이!!"
"오, 단풍놀이! 좋은데? 오랜만에 기특한 생각했네 김찰스?"
많은 데이트 코스 중 등산을 선택한 이유는 산을 좋아해서라기 보다, 산 정상에서 그녀와 함께 김밥과 막걸리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탁 트인 전경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발.
'캬-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한 수다 김찰스!!'
아주 역동적인 하루를 앞두고 잔뜩 기대에 부푼 주말 아침. 그녀를 만나자마자 준비물 체크를 시작했다.
"김밥 싸왔어? 김밥?"
"당연하지! 불고기도 싸왔지롱!"
(그녀의 요리 실력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불고기라니..)
"찰스는 막걸리 챙겼어?"
"당연하다!! 쨘! 막걸리 두 통과 돗자리!!"
사실 뭐 유명하거나 높은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동네 뒷산을 오르는 거라 츄리닝 바람에 운동화를 신으니 등산 준비가 다 끝났다.
음식들만 잔뜩 들은 가방을 들쳐 메고 말했다.
"자! 가볼까!?"
(이때 나의 표정은 엄홍길 대장보다 더 비장해 보였을지도..)
가을 아침의 산바람은 빨갛거나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달달하고 개운한 맛이었다. 그 바람을 맞고 있자니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결혼할 여자를 정할 땐 등산을 가봐!"
(뭐 이런 류의 말은 그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던 말이었는데, 사실 아직도 '왜?'라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뭐 일단 해보면 알겠지.'
그녀와 함께 산길을 밟기 시작했다. 우리 집 뒤편으로 시작되는 등산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은 코스였는지, 오르는 사람이 우리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나름 가파른 흙길 사이로 피어난 풀꽃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너무 좋지 않으냐고. 그래서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말을 거는데,
"아침에 산에 오니까 너무 좋지 않....?"
"헉... 헉... 뭐..?"
그녀는 저만큼 뒤쳐져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하하, 힘들어?? 어휴 얼굴 벌게진 거 봐."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는데, 그녀가 말했다.
"우리.. 꼭... 정상에서 먹을 필요가 있나...?"
"으.. 응...?"
"아니, 꼭 정상에서만 김밥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함께 있다면 이곳이 바로 낙원이지!"
"그.. 그렇긴 한데.. 우리 이제 반도 못 올라왔는데..?"
"됐어. 돗자리 펴"
체력이 조금 약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숨을 헐떡이며 등산로 중간에 돗자리를 피라고 말하는 그녀는, 정말이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결국 순순히 그녀의 말대로 등산로 한가운데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 한 차례 숨을 돌린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난 정상까지 갈 수 있어! 그런 건 너무 흔하니까, 찰스한테 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여기서 먹자고 하는 거야! 아니, 싫으면 지금이라도 올라갈래??"
"아, 아냐. 내가 힘들어서 못 갈 거 같아. 고마워, 이런 독특하고 좋은 추억 만들어줘서."
'확실히 등산 삼십 분 만에 자리 깔고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는 추억은 흔한 게 아니지..'
어쨌거나 그녀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본래의 목적 자체가 정상까지 오르는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자는 것이었으니, 오히려 정상까지 가는 것보다 더 유쾌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찬 바람에 땀을 식혀가며 기분 좋게 막걸리를 마시는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찰스는 나 일본 가면 어떨 것 같아?"
요즘 들어 그녀가 이런 식의 이야기를 종종 꺼낸다.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음... 많이 외롭겠지?"
뭔가 분위기가 무거워지려고 한다.
"그게 끝이야?"
'위험한데.'
"응? 음.. 많이 허전할 것 같긴 해.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따라간다거나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우리가 서로 그 부분을 인정하고 만남을 시작했으니까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아주 힘든 시간이 될 거야."
결국 터졌다. 내 진심이었지만 우리의 이별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한 적이 없어서, 혹시 그녀가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그냥 듣고 싶었어. 그 마음."
그리고 또 평소처럼 베시시- 하고 웃는 그녀.
산을 내려올 때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아직 정확한 날짜가 나온 것도 아니고, 혹시 또 알아? 다른 사람이 대신 가게 될지? 그러니까 우리 되도록이면 그때 생각은 하지 말자.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후회 안 할 만큼, 지금은 사랑하는 것만 생각하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 생각한다.
그때의 우린, 어떤 모습일까.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