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등산 때도 그렇고, 최근 얼마간 그녀의 기분이 영 우울해 보였었다. 지나가듯 물어도 항상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기분탓이겠거니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그러던 차에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퇴근하고 만나자, 할 말 있어.]
'흠...'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할 말 있어.'라고 하는 경우에는 보통 '좋지 않은 이야기'임을 직감한다. 연인 관계에서는 대개 '이별'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 말이지(이전에 겪은 이별 역시 '할 말 있다.'는 말로 시작됐던 것처럼).
하루 종일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출국 전에 날 정리하고 갈 셈인가.'
오직 이 생각만으로 가득 차,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 커피집.
오늘은 내가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와 인사했다.
"고생했어 사월양! 밖에 춥지? 옷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니까."
"괜찮아. 오래 기다렸어?"
마치 그녀의 '할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으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바쁘게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가 결국 이야기를 꺼낸다.
"찰스, 근데 나 할 말 있어."
"응응, 얘기해."
(두근, 두근)
"나 출국 날짜 나왔어. 12월 15일이야."
아. 이거였구나.
"생각보다 일정이 당겨진 모양이야... 그래도 올해는 여기서 보낼 줄 알았는데..."
분명히 예정보다 일찍 떠나게 된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한 최악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음, 그랬구나. 이제 한 달이네."
한 달. 말을 뱉어놓고 보니,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최악인가.
아무리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연애라도 명확한 날짜가 정해지자, 이 또한 이별 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린, 그날 헤어지는 거구나...'
"미안해."
느닷없고 기습적인 그녀의 사과.
우리의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서로 '끝'에 대한 약속을 했었고,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뿐인데, 이제와 내게 사과를 하고 있다.
"에이, 너가 뭐가 미안해! 우리 이렇게 사랑한 게 잘못한 거 아니잖아. 다 알고 시작한 건데 왜 미안해."
처음 그녀와 치킨을 먹을 때, 그녀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고백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녀와 사랑을 주고받은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고된 이별'은 피하지 않았을까 해서.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는 지금도 이런데, 출국하는 날 그녀는, 그리고 나는, 얼마나 슬플지 감도 오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생각보다 시간이 일찍 잡힌 것뿐이지,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린 어제처럼, 내일도 사랑하면 되는 거야. 떠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해지겠지만, 그래도 애써 볼게. 웃자 사월아."
"후... 그래..."
그녀는 힘겹게 고민하던 말을 꺼낸 것일 텐데, 아직도 뭔가 남아있는 듯했다. 한숨을 크게 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근데, 찰스는 왜 나한테 가지 말라고 안 해? 따라가 준다고, 아니면 기다리겠다고 그런 말 왜 한 번을 안 해? 진짜 나 출국하면 우리 끝나는 거야? 사랑한다며. 나 일본 가도 가끔 한국 올 수도 있고 그런데 왜, 출국하면 다 끝날 것처럼 얘기해?"
이것이 그녀의 앓던 속내였구나. 그녀는 내가 말해주길 바랬던 거구나. 그녀의 진심이 또렷한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나 또한 그녀에게 나의 진심을 대답해줘야 했다. 그것이 상처가 될 지라도.
"이렇게 말하면 너가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확실히 얘기할게.
난 순간에 진심이 있다고 믿어.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기다리겠다고, 그래도 우리 계속 이어가자고.
난 지금 이 순간 너를 사랑하지만,
너가 내 앞에 없을 때도 지금처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없는 거야.
누구나 시작할 땐 천년만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국 이별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함부로 확신하는 것보단
이 편이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했어.
화나고 서운하고 분한 것도 알고,
이런 내가 이해되지 않겠지만,
내 생각은 이래."
누구보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를 확신할 수 없지만, 대신 이 순간엔 진심을 다해 사랑하자고, 그래서 후회는 남기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해를 바라진 않지만, 이런 생각의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속의 날이 눈 앞까지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