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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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담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약물 치료를 시작한 초반에는 미세한 호전이 있는 듯 보였지만, 그 희미한 변화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힘든 치료를 이어가도,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었고, 몸은 하루하루 조금씩 더 망가져만 갔습니다.


“더 이상의 스테로이드 치료는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더 심해질 수 있어요. 이제는 치료 방향을 다시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의사의 말투에서도, 간호사의 시선에서도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그 따뜻한 거짓마저 자취를 감췄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허탈한 마음으로 병원 근처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으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병원에서는 어떻데? 밥은 먹었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다정한 말 너머로, 의사의 냉정한 목소리가 뒤엉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유전성 발병의 경우,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사용해도 치료 반응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엔… 예후가 상당히 나쁩니다.”)


아버지의 걱정 어린 말은 곧 의사의 냉정한 목소리와 겹쳐 들려왔고, 망가진 제정신은 그 다정한 물음마저도 잔혹한 현실을 일깨우는 비명처럼 들려왔습니다.


“몰라. 끊어.”


버릇없이 전화를 툭 끊고는, 두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거짓된 환청이라는 걸 알면서도, 비틀린 제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어느샌가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두 귀를 막았습니다.


다정한 말조차 독처럼 스며드는 지금,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식탁에 앉아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더워서인지 걷어올린 소매 사이로, 불룩하게 솟은 투석 혈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굵은 밧줄처럼 피부 위로 도드라진 그 혈관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 팔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곧 제게도 닮아올 팔이자 닮아올 삶인 것만 같았습니다.


“곧 너도 이렇게 될 거야”


그 팔이 말없이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좋아질 거다. 너무 걱정 말고.”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희망이 배어 있었고, 그 떨리는 말끝은 꾹 눌러 참아오던 감정을 무너뜨리는 작은 불씨가 되었습니다.



“좋아지긴… 뭐가 좋아지는데, 뭘 알고 그런 말을 해?”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께 화를 냈습니다.


화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거칠게 뒤엉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작고 굽은 어깨가, 움츠러드는 게 보였습니다.


힘없이 내려앉은 어깨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미 터져버린 감정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큰소리냐’고 화라도 내주셨다면, 마음이 조금은 덜 불편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 없이 도드라진 투석 혈관을 옷소매로 조용히 가려내셨습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또 무슨 상처를 드리진 않을까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는 게 점점 두려워졌습니다.


무심한 시간은 그저 흘러가기만 했고, 스테로이드를 줄이며 시작한 면역억제제 치료 또한 끝내, 아무런 효과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병든 아버지가 매일같이 일을 나가는 모습이, 어느새 제 일상 속 당연한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새벽이면 묵묵히 작업복을 챙겨 입으시고, 투석을 마친 팔로 고철을 옮기고, 먼지 날리는 일터를 다녀오시는 그 일상이… 이젠 덤덤하게 보입니다.



자식으로 써 고통스러워야 마땅한 장면이었습니다.


부정하고, 막아서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익숙해져 갔습니다.


‘나도 아픈데, 어떡하라고’


억지로 뱉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나는 점점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점점, 나 자신이 역겨워졌습니다.


고통 앞에서 비겁해지는 나.


아버지를 원망하고, 가족을 밀어내고, 혼자 아프다고 믿는 나.


그렇게 저는,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짓누르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새벽 화장실에 가려고 방을 나온 순간, 어딘가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처음엔 TV라도 켜놓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소리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흐느낌이라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살짝 열린 안방 문 틈 사이로,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숨죽인 울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그 옆에서 어머니는 무너진 등을 조용히 안고 계셨습니다.


“내가…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거야… 내가 잘못 살아서, 내 새끼가 대신 벌을 받는 거야… 저게 뭔 죄가 있다고…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렇게 아파야 하냐고…”


아버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저놈 더 아프면… 내 신장이라도 줘야 하는데… 내가 몸이 이래서… 병신이라… 그것조차 못 해… 아비라는 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내가 “


흐느낌은 점점 거칠어졌고, 숨을 삼키듯 울음을 막아보려 애쓰는 그 모습이 제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웠습니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를 꼭 안아드리지 못하는 이 비겁함이, 정말이지… 죽도록 싫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부모님께 안겨드려야 할 절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 생각이 목을 조여 오는 밧줄처럼 다가와,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으로 가슴을 옥죄어 왔습니다.


도대체…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앞으로 뭘 해야, 어디까지 버텨야

이 지옥 같은 고통이 끝이 나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희망이라는 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지금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정말 신이 있다면, 부디… 이 고통의 끝에 닿을 수 있는 해답을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유치해 보였을지도,

조금은 유난스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 모든 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감정을 억누르며 써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담담하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그래서 ‘존댓말’이라는 형식을 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이야기부터는 저에게 일어난 일이 아닌, 제가 직접 선택하고, 끝내 걸어가야만 했던 이야기들을 써보려 합니다.


넘어지면서도 외면할 수 없었던 길,

그 끝을 향해 스스로를 밀어 넣던 시간들,

그 이야기를 이제, 조금은 더 깊숙이 다가가 전해보려 합니다.


새로운 브런치북 **《그래서, 피는 못 속입니다 2》**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