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울 앞에 서면, 스물아홉 해를 함께한 익숙한 제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낯설고 무너진 형체 하나.
터질 듯이 부은 얼굴
혹처럼 불룩하게 솟은 목덜미
듬성듬성 빠져 있는 머리카락
온몸에 퍼진 붉은 발진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배와 터져나간 튼살 자국들까지
이젠 자주 보던 사람들조차, 길에서 마주쳐도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초기 한두 달 동안은, 매일 만 보씩 걸으며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너지는 몸을 붙들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집 앞 슈퍼에 다녀오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관절마다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퍼지고, 다리는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한 채 휘청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문처럼 느껴지다 보니, 짧은 외출 하나에도 매번 큰 결심이 필요해졌습니다.
통증은 참 간사하고 집요했습니다.
하루쯤은 편히 보내게 해주는 듯 잠잠하다가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관절 마디마디가 꺾이는 듯한 통증이 몰려오고, 몸은 비명을 지르듯 저절로 뒤틀립니다.
스테로이드라는 약이 준 불면증은, 잠들 틈조차 주지 않은 채 고통을 뼛속까지 느껴보라며, 몸을 억지로 깨운 상태로 밤을 질질 끌고 갑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괴로웠던 건, 감정의 결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조금 예민해졌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그런가 보지. 곧 나아지겠지.”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넘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속을 뒤집는 듯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걱정 섞인 눈빛마저, 위로보다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값싼 동정처럼 느껴졌습니다.
‘괜찮냐’, ‘힘들겠다’ 같은 말들이 하나같이 형식적인 위로처럼 들렸고, 그 모든 말들이 오히려 날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뭘 안다고? 네가 뭘 안다고, 감히 그런 말을 해? 무슨 자격으로?’
언젠가부터 제 안에서는 분노가 쉬지 않고 끓어올랐고, 아무리 눌러도 터질 듯 요동쳤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밉게만 보였고, 건네는 위로나 공감도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습니다.
차라리 사람들과 마주 앉는 것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벽을 마주 보는 게 훨씬 편했습니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을 열 필요도, 표정을 지을 이유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오히려 숨 쉴 틈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채, 하루 종일 불 꺼진 방 안에서 터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았습니다.
같은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해… 왜 나만 아프고, 왜 나만 이렇게 망가져야 해… 배고파, 자고 싶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다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배고파, 배고파 미치겠어, 자고 싶어, 제발, 하루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좀 자고 싶어…”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지배한 건 고작 세 가지,
끝도 없이 반복되는 절규, 배고픔, 그리고 잠들고 싶은 갈망뿐이었습니다.
놀라울 만큼 원초적이고, 슬플 만큼 단순한 감정들은 온 정신을 뒤덮는 장막처럼 퍼져, 생각도 이성도 제자리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스테로이드의 흔한 정신과적 부작용일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고용량 스테로이드는 분노 조절 장애, 불안, 불면, 심지어 망상과 우울증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에 내가 나인지. 아니면 몇 달 전에 내가 나인지.
가끔은, 스테로이드라는 약이 모든 가식을 벗겨내고 추악한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약을 복용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사랑했고 간절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역겹고 혐오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책장을 가득 채웠던, 내 꿈의 증거였던 커피 관련 서적들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함께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던 물건들마저, 마음을 비워내듯 쓰레기봉투에 담아버렸습니다.
휴대폰 속 전화번호들과 앨범 속 사진들도 모두 지우고, 비우고, 털어냈습니다.
온기를 닫고, 흔적을 지우고, 마음을 비운 자리에 남은 건, 결국 가족뿐이었습니다.
그 말은, 이제 제 감정이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가족뿐이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더 이상 사랑도 고마움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이라는 말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댈 곳이라 믿었던 존재들이, 오히려 나를 이 지옥에 붙잡아두는 족쇄처럼 여겨졌습니다.
정신은 점점 피폐해졌고, 감정의 경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누굴 미워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웠고, 결국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증오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힘겹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과녁 없이 마구 쏘아대던 증오의 화살이, 결국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껴온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