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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전 찔린 바늘 끝에서, 제 병명이 묻어 나왔습니다.
“FSGS입니다. 초점성 사구체 경화증이라는 병입니다.”
처음 듣는 병명이었지만, 교수님의 표정만으로도 그 심각성 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구체는 혈액 속 노폐물을 걸러주는 필터 같은 역할을 해요. 그런데 이 병은 그 일부가 굳고 망가지면서, 원래 소변으로 나가면 안 되는 단백질이 빠져나오게 되는 겁니다.”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가셨습니다.
“‘초점성’이라는 건 사구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손상됐다는 뜻이고, ‘경화증’은 그 부위가 굳어서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의미예요. 문제는… 예후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겁니다. 치료 반응이 없는 경우도 많고, 결국 투석까지 가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그래도 약이 잘 듣는 경우도 있으니까… 일단 치료부터 시작해 봅시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망설임 끝에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 치료를 하면서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교수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 채 깊은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지금 그런 걸 걱정하실 상황이 아닙니다. 상태가 심각해서, 언제든 합병증이 생길 수 있어요. 고강도 약물 치료가 바로 시작돼야 하고, 설령 반응이 좋아도 최소 1년은 안정적으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교수님은 모니터 속 단백뇨, 알부민, 크레아티닌 수치를 짚으며, 지금 내 몸으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일깨워주셨습니다.
“지금 몸으로 고된 일을 하겠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은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몸에 부담이 되고, 자칫하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교수님의 단호한 말투는 더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따끔히 일러주는 듯했습니다.
“일단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단백뇨를 줄이고 병의 진행을 늦추는 게 우선입니다. 면역체계에 영향을 주는 약이라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문득 예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정보들이 떠올랐습니다. 부작용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걸 생각하면 그 정도쯤은 별거 아닐 거라 여겼습니다.
“치료가 시작되면... 많이 힘드실 겁니다. 단기간엔 체중 증가나 안면 부종, 수면 장애, 식욕 항진 같은 증상이 흔하게 나타나고, 장기적으로는 고관절 괴사나 혈당 조절 이상, 감염 위험 증가로 합병증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진지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제 마음속엔 두려움보다 냉소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힘들어 봤자, 뭐 얼마나 힘들겠어.’
약을 받아 든 그 순간까지도, 이 치료가 나를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을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불편하긴 하겠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일 리는 없다고, 지금까지 버텨온 나를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문제없을 거라, 그렇게 어설픈 자신감과 얕은 경험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건방진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약 봉투를 펼쳤습니다.
하루에 먹어야 할 약은 스테로이드 열여섯 알을 포함해, 콜레스테롤 약, 혈압약, 비타민, 빈혈약, 위장약까지... 책상 위는 마치 약국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습니다.
약물 반응이 좋은 사람, 그 ‘운 좋은 소수’가 나이길 바라며, 한 움큼의 약을 망설임 없이 털어 넣었습니다.
약을 복용한 후 맞이한 다음 날 아침
‘어, 몸이 왜 이렇지?’
늘 축 처져 있던 몸이, 낯설게도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와 무기력함이 스르르 걷히고, 왠지 모를 활력과 자신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오랜만에 햇볕을 제대로 쬔 날처럼 몸과 마음이 동시에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둘째 날.
늘 막혀 있던 코가 거짓말처럼 뻥 뚫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줄곧 괴롭혀오던 비염이 감쪽같이 사라진 듯했고, 공기가 가슴 깊숙이 시원하게 들어오며, 머릿속까지 개운하게 맑아졌습니다.
며칠 만에 몸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몇 달째 입맛이 없어 밥에 물을 말아 억지로 넘기기만 하던 제가, 그날은 밥알 하나하나의 고소한 맛이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입안에 따뜻한 감촉이 퍼지는 그 순간, ‘입맛이 돌아왔구나’ 실감이 났고, 고봉밥 두 그릇을 단숨에 해치웠습니다.
’이 약, 생각보다 괜찮은데?‘
먹을 만하다는 착각이 들 만큼, 스테로이드는 강하고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몸도 숨도 한결 가벼워지고, 밥맛까지 돌아오자 ‘괜찮아지고 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셋째 날 밤, 처음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낌새가 느껴졌습니다.
자정이 훌쩍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분명 피곤했지만, 눈꺼풀은 닫히지 않았고, 머리는 쉴 틈 없이 돌아갔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렸고, 숨이 얕아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방 안에 고요함이 오히려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습니다.
시계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 냉장고의 진동, 옷깃이 이불에 스치는 소리까지.
눈을 감아도 의식은 깨어 있었고, 심장은 이유 없이 빠르게 뛰었으며, 온몸에 묘한 예민함이 번져갔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속은 이유 없이 메스꺼웠습니다.
복용 일주일 후.
점점 몸의 감각이 하나둘씩 흐려졌습니다.
감정도, 말투도, 내가 가진 모든 감각들이 서서히 뿌연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틈을 타, 전혀 낯선 무언가가 제 안을 파고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졌고, 화장실에 한 번 다녀오려 일어서는 것조차 관절이 쑤시고 버거웠습니다.
자꾸만 몸이 낯설게 느껴지던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화장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순간, 몸이 굳었습니다.
그 얼굴은 분명 나였지만, 내가 기억하는 내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광대는 사라지고, 턱선은 둥글게 부풀어 있었으며, 부은 눈두덩 아래로 낯선 표정이 비쳐 있었습니다.
어딘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누군가’가 거울 너머에 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