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품격이 정치의 품격을 결정한다

by 박지현

설 특집 라디오 방송에 오랜만에 출연했다. 오래간만에 출연이라 평소보다 약간 긴장을 하기도 했지만, 녹화 방송이라 안도감이 들었다. 설 연휴 첫날, 영상이 공개된 후 조심스레 댓글을 쭉 훑어보았다.


댓글창의 풍경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진 수준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수년간 내가 마주했던 언어들은 이보다 훨씬 처참했다.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성희롱적 발언, 여성, 지방대생,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비하, 그리고 가족을 향한 저주에 가까운 공격들이 일상처럼 쏟아졌다. 화면을 가득 채운 증오의 문장들은 때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혔고,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할 무게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폭력이었다.


정치인은 자신의 언행이 타인의 거울에 어떻게 비치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직업이다. 하지만 정당한 비판이 아닌 무분별한 혐오가 쏟아질 때, 정치인은 거울을 보는 대신 방패를 드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누군가의 눈에 내가 정치인으로서 부족하게 비쳤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 돌아보고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합리적 비판과 맹목적 비난 사이의 무너진 경계다.


비판은 상대의 논리를 파고들어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게 하는 창조적 에너지다. 반면 비난은 오직 상대의 인격을 무너뜨려 무력화시키는 데 목적을 둔 소모적 폭력이다. 학벌이나 외모, 성별과 같은 본질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비아냥거리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토양인 토론의 장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마음 아픈 지점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나 가족들의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두고도, 댓글창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혐오와 저주를 쏟아내는 이중성이다. 본인의 가족이나 신념은 소중히 여기면서, 화면 건너편 타인의 인격은 손쉽게 훼손해도 된다고 믿는 비겁함은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손가락으로 쓴 문장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는 없다.


품격 있는 비판이 정치를 바꾸는 실제적인 동력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비난이 섞인 언어는 듣는 이의 방어 기제를 자극하여 귀를 닫게 만들지만, 논리에 기반한 날카로운 비판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책적 결함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정치인이 비난의 화살을 피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대신 비판을 파악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데 집중할 때, 정치는 비로소 정쟁의 기술자가 아닌 ‘문제의 해결사‘로 거듭날 수 있다.


한동안 나는 댓글창을 아예 안 보려고 한 적도 있다. 댓글을 보는 게 심적으로 괴롭고 해로우니, 주변에서는 “우리가 보고 당신이 봐야 할 댓글들은 걸러서 전해주겠다”라는 제안을 준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정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기에 완전히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거리 두기가 전제된 인터넷 문화다.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비난의 화살을 쏘기 전에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먼저 묻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닌 정책과 논리에 집중하는 댓글, 상대의 약점이 아닌 대안의 허점을 지적하는 비판이 많아질 때 정치는 비로소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혐오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합리적인 의구심과 건설적인 제안이 채워진다면, 정치인은 팬덤의 눈치가 아닌 시민의 삶을 살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글이 정당한 비판이라 믿는 분들께 정중히 제안한다. 댓글을 달기 전 딱 한 번만 자문해 보길 바란다. "이 문장이 내 가족이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인가?"라고 말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나를 미워하고 지탄하는 분들께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한다. 다만 올해는 타인의 삶을 깎아내리며 얻는 찰나의 위안 대신, 자신의 일상을 돌보며 얻는 단단한 행복을 찾길 간절히 소망한다. 증오에 쏟는 에너지가 서로를 사랑하는 동력으로 바뀐다면,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분명 작년보다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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