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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훈느 Oct 01. 2021

무언가를 '까는' 재미

손가락이 닳도록 까 먹어도 자꾸 먹고싶은 갯가재 (皮皮虾) 

'깐다' 라는 표현은 중의적이다. 껍질이나 껍데기를 벗긴다는 사전적 의미부터 수다떨며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하는 '노가리 깐다', 누군가를 험담하거나 깎아내리는 의미의 '000을 깐다', 군기를 잡아 채근한다는 의미의 '깐다' 같이 사전적 의미와 전혀 상관 없지만 폭 넓고 흔하게 쓰이는 말 중 하나가 바로 '깐다' 이다. 처음 해보는 독립에 삶의 질은 높았지만 업무는 결코 녹록치 않던 중국 파견 시절, 가장 어려운 것은 매일 여기 저기서 '까이며' 적지 않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일과를 보내는 것이었다. 어느날 점심, '내가 진짜 회의때마다 할말이 없어서 못하는게 아니고, 있는데 안하는거야' 하며 하소연하는 나에게 친애하는 나의 밥친구이자 술친구들이 갑자기 해산물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언제 뭐 가리는거 봤어? 하니 씨익 웃으며 그럼 오늘 저녁에 피피샤(皮皮虾) 를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     


대체 피피샤가 뭔데? 하지만 가보면 안다는 친구들이 데려간 곳은 난징동루(南京东路) 보행자거리 한복판이다. 쇼핑하러, 와이탄 야경을 보러 꾸물꾸물 움직이는 관광객 천지인 그곳. 유동인구도 많고 가끔은 정말 발 디딜 곳 도 없이 복잡해 그쪽 사무실로 외근을 가거나 매장을 보러가는 게 아니라면 잘 가지 않는 동네인데 대체 여길 상하이 토박이 친구들이 왜? 싶었는데 이내 메인 스트릿이 아닌 뒤편 골목인 티엔진루(天津路)로 나를 이끈다. 그러면 그렇지. 이친구들이 관광객용 식당에 데려갈 리 없다며 갑자기 안도의 웃음이 나온다. 

오래된 건물, 아저씨들로 가득찬 테이블. 느낌이 온다.

가끔은 팬시한 레스토랑에 가서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한 점 요리를 맛보는 걸 즐기고, 유명하다는 카페나 식당엔 꼭 가봐야 성이 차는 성격이지만 사실 나는 본래가 타고난 노포 체질이다. 편안하고 스스럼 없는 분위기에서 반주를 즐기며 맛있는것을 먹는게 잘 차려입고 인증샷을 찍으며 식사하는 것 보다 훨씬 좋다. 허름하고 오래되어 보이는 집 중에서 간혹 꼭 저곳은 가봐야 한다는 촉이 오는 집들이 있는데 그런곳에 들어가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오면 보물을 발견했다는 느낌에 기분이 째지기도 한다. 그런데 번화가 뒤편 좁고 어둡고 오래된 길거리 모퉁이에서 이 집을 발견하고 오래간만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 빽빽한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한 낡고 오래된 저층 건물, 언제부터 매달려 있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대문짝만한 샤오닝보해산물집 (小宁波海鲜馆) 이란 간판. 담배피는 아저씨와 할아버지들로 그득그득 차 있는 테이블. 첫눈에 느낌이 왔다. 오래된 잘하는 집이구나. 일단 가게 이름부터 신뢰가 간다. 닝보(宁波)는 저장성에서 해산물과 떡으로 유명한 도시가 아닌가. 닝보 라는 글자가 들어간 해산물 요리집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주비빔밥집, 포천이동갈비집, 수원왕갈비집, 부산돼지국밥집 같이 그 명성이 어느정도 검증된 이름인 것이다.


"아 그러니까 피피샤는 해산물이구나?" 하니 친구들이 웃는다. 먹으면 맛있다고. 일단 들어가 앉자고 한다.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 카운터 옆에 그득한 수조들을 보고 나는 나혼자 와서 즐기긴 어려운 곳임을 직감한다. 

수조에서 재료를 골라 원하는 조리법으로 주문해야 하는 집. 어찌저찌 일상 대화와 업무는 중국어로 쥐어 짜 이어갈 수 있어도 수많은 해산물의 고유명사는 알 수 없는데다가, 무슨 재료에 어떤 요리법이 어울리는지도 감이 오지 않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주인 아저씨와 종업원은 격한 상하이 사투리를 구사한다. 이곳은 현지레벨 만랩이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집이었다. 수조에는 문어, 낙지, 작은 생선들이, 쇼케이스엔 얼음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생선이 담겨 있으며 그 앞 스티로폼 박스에는 패류, 갑각류가 그득그득이다. 한눈에 봐도 신선한 재료들인걸 알 수 있는 모양새다. 퇴근한 뒤 도착한 저녁 시간인데도 새벽 수산시장에서 보는 것 같은 활기참이 느껴진다. 수조와 박스에 끊임 없이 흐르게 놔 둔 물 때문에 바닥은 질척이고 술기운이 오른 아저씨들은 왁자하고, 담배 냄새도 그득하지만 알 수 없는 즐거운 기운이 솟아나 뭘 먹고 싶냐는 친구들 물음에 나도 "이거, 저거, 저거 요리법은 맘대로 해도 괜찮아. 추천하는데로 믿고 따를게!" 를 외친다. "그런데, 이중에 피피샤가 도대체 뭐야?" 하니 그제서야 주문을 받는 아주머니가 웃으며 손짓한다. 외관을 들여다보니 아하. 알겠다. 피피샤 (皮皮虾)는 바로 갯가재 였다. 한국에도 이거 있냐는 질문에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한다. "당연하지. 근데 껍질 까기 귀찮고 보통은 찌거나 국으로 많이 먹는것같아!" 그걸 국으로? 하며 그럼 오늘은 쟈오옌피피샤 (椒盐皮皮虾) 로 먹어보라며 친구들은 통 크게 3인분을 주문한다. 아주머니도 이건 그게 제일 맛있지 하고 맞장구 치며 뜰채로 갯가재를 건져낸다. 쟈오옌(椒盐), 후추와 소금이라는 뜻이다. 후추와 소금, 최소한의 향신 채소만 넣어 볶아내는 요리는 재료가 좋지 않으면 맛을 살려낼 수 가 없는데 수조 속 재료 퀄리티를 보니 느낌이 온다. 이건 '맛없없' 이다. 저 재료에 즉석 조리법이면 맛이 없을리 없다.        


요즘 본사랑 중국 지사 사이에 딱 껴 있는 내 위치가 너무 애매한데 내가 상대할 사람들은 양쪽 사무실의 임원이랑 팀장들이라 그런게 너무 어렵다고. 이 자리는 나같은 일개 담당이 아니라 최소한 팀장이나 임원이 있어야 맞는게 아닐까 하며 툴툴거리는 나에게 친구들은 니가 그래도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니 괜찮아. 라고 위로한다. 그냥 일은 일이고, 맛있는거 먹고 내일 아침에 운동하고 잊어 버리라며 오늘 피피샤 많이 먹고 나면 다음에 또 오고 싶을거라고, 화가 날 때 마다 이곳에 오자고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속에서 불같이 화가 나고 스트레스 받아도 잘 먹고 잘 뛰고 샤워하고 나면 생각보다 빠르게 진정되는 성격 탓에 10여년간의 직장 생활 중 퇴근 후 자기 전까지 가슴 앓이를 하거나 월요병에 시달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못보던 먹을 것 천지인 중국에서 음식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방법은 한두가지가 아니므로 나는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었고, 마침 때맞춰 나오는 음식들도 하나같이 굉장해 보여 아까부터 이미 나아져 있던 기분이 한층 더 업 되었다. 가볍게 술에 찐 새우, 맵게 볶은 바지락, 마늘과 당면을 얹어 쪄낸 가리비에 이어 나온 병어 조림을 보니 젓가락과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병어는 삼치, 가자미, 전갱이, 고등어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생선 중 하나이다. 특히 엄마는 감자와 생강, 마늘을 넣고 병어조림을 잘 해주었는데 맛이 희미한 흰살 생선에 간장 양념을 끼얹어 먹는게 그렇게 맛있었다. 타지에서 집밥 같은 음식을 보니 손바닥만한 병어에 마늘과 마늘쫑을 넣고 간장에 조려낸 간단한 이 음식이 특히 반갑다.    


사람 수 대로 나온 가리비는 진작 비웠고 바지락도 거의 껍질만 남았다. 그나마 아직 남아있는 새우 껍질을 부산히 까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궁금하고 기대하던 피피샤 (皮皮虾) 가 나온다. 주인공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소금 후추, 양파와 파만 넣고 볶아져 나온 피피샤

친구들이 3인분을 주문하며 뜨겁게 1인분씩 달라고 했는지 자그마한 접시에 담긴 양이 뭔가 아쉽다. 다 먹으면 나머지를 가져다 주겠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다. 갯가재를 먹어보는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이전에도 중화권 나라에서 먹어본적이 있다. 홍콩 출장 때 다진 마늘을 잔뜩 얹어낸 갯가재 튀김을 먹고 '싯가' 라며 비싼 값을 지불하고 식당을 허둥지둥 나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갯가재는 차지고 단단한 살이 맛있긴 하지만 까기 어렵고 먹을 양에 비해 가격도 비싼 음식이란 인식이 있다. 이거 엄청 비싼거 아니야? 라고 하니 친구들이 고개를 젓는다. 이집이 아주 저렴한 집은 아니지만 가격이 그래도 괜찮은 편이고 일단 이렇게 신선한 곳은 별로 없다며, 그렇게 비싼 음식 아니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한번 홍콩에서 엄청나게 비싸게 주고 먹은 적이 있다고 하니 친구들이 바가지 쓴거 아니냐며 놀린다. 김이 펄펄 나는 갯가재 끄트머리를 붙들고 마디 마디의 껍질을 까는데 유독 나만 속도가 느리다. 친구들이 하는걸 보니 머리를 떼낸 뒤 꼬리를 잡고 드르륵 한번에 잘도 벗겨내는데 나만 끊어지고 잘리고 난리가 났다. 하다보면 요령이 생긴다며 내가 하나를 겨우 먹는 동안 서너개씩은 이미 해치운 친구들이 말한다.      


피피샤(皮皮虾) 를 까며 고민거리를 얘기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이를 까거나 하는 이 왁자한 회동은 그 후로도 몇번이나 계속되었다. 알이 가득 차서 더욱 맛있어지는 계절에는 한 주에 두세번씩 한달에 열번쯤 간적도 있었다. 처음엔 형식적으로 빈 자리를 내어주던 남자 사장님은 이내 우리와 위챗 친구 추가를 하기까지 했는데 몇시에 몇명 도착 예정이라고 미리 연락하면 예약석을 잡아주는 건 물론이고 오늘은 특별히 물이 좋은 무슨무슨 재료가 들어온다. 피피샤도 오늘 품질이 좋다 라고 연락까지 주는 사이가 되었다.

 평소 새 모이만큼만 밥을 먹는 내 친구들이 그곳만 가면 1인 1피피샤(皮皮虾) 는 간단히 기본으로 먹고 나오는데다가 다른 요리도 적지 않게 시키고, 가끔 여러 명이 모여 술이라도 마시는 날엔 병맥주를 한 상자씩 마시면서도 담배도 안 피우고 영업 마감 전에 비교적 일찍 일어나니 사장 입장에서는 싫지 않은 손님임이 분명했다. 갈때마다 좀처럼 젊은 여자 손님이라곤 눈을 씻고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니 다른 단골에게도 우리는 꽤 눈에 띄는 손님들이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일어난 자리엔 언제나 살을 발라낸 갯가재 머리와 껍질이 수북했다. 먹는걸로 어디 가서 절대 빠지지 않는 나의 피피샤 껍질 까는 기술 역시 눈이 부시게 발전했는데, 나중에는 친구들보다 더 엄청난 요령이 생겨 끊어지는 껍질 하나 없이 갯가재 모양을 그대로 살려 등껍질만 삭 들어내는 손기술까지 생길 정도였다. 친구들은 대체 언제 그렇게 잘 까게 된거냐며, 와 진짜 저렇게 한번에 까는 건 처음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갯가재 껍질은 끝이 생각보다 날카롭고 뾰족해 가끔 손가락을 찔리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러면서도 짭잘하고 단단한 살점을 좀 더 먹고 싶어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지문이 닳도록 까 먹었다. 생각해보면 손가락과 입을 끊임 없이 놀리며 뭔가를 하는 행위 그 자체가 기분이 좋아졌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부담 없이 해산물을 먹기엔 단가가 너무 높은 서울에서 일하고 있으니 혹시나 다음에 유독 일이 진도가 안나가고 머리가 답답한 야근과 마주하면 사무실 어디 구석에서 땅콩 껍질이나 ABC 초콜릿이라도 까면서 막힌 일을 꾸역꾸역 해나가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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