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농대 박사과정의 길을 시작하며
대학 전공을 선택하던 10대의 나는 단순했다. 아버지가 식품을 연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 익숙하고 존경스럽기도 했고, 먹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 숙제로 '수제비 반죽 두께와 조리 시간에 따른 식감 변화'를 실험해서 제출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식품학은 내게 정해진 운명 같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그건 적당한 타협이었다. 요리를 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반대를 꺾을 용기는 없었고, 성적 맞춰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친숙한 곳이 농대, 그중 식품 계열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도망자였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할머니와 삼촌, 그 곁을 지키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공부는 뒷전으로 했다. 가족을 도와 같이 병문안을 가며 공부는 뒤에 두어도 되겠지라고 생각했고, 선배, 동기들과 술잔 들며 고민을 포기하고, 한때는 술집 사장이 꿈이기도 했다. 학점은 바닥을 기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은 늘 술 냄새에 묻혔다.
나를 바꾼 건,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죽음이었다. 군 복무를 위해 의무소방원으로 복무하며 구조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실종, 자살, 사고 현장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제까지 나와 똑같이 숨 쉬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었던가. 이 귀한 삶을 나는 왜 낭비하고 있었던가.
그때부터 무작정 책을 펴 들었다. 1학년 전공책을 다시 꺼내 읽고, 주식, 부동산, 심지어 코딩까지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전역 후 복학한 학교는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닌 기회의 땅이었다. 교수님들을 찾아다니고 창업 프로그램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운명적인 장면을 마주했다. 학회에서 만난 오하이오 주립대(OSU)의 교수님. 줌(Zoom) 화면 너머의 백발 노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이야기하며 마치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내용은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 하나만은 뇌리에 박혔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내 일을 저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금 미국에 있는 이유다.
사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석사 과정 중에는 마음이 무너져 심리 상담을 받기도 했고, 내 선택을 수없이 의심했다. 그때마다 나를 잡아준 건 내 곁을 지켜준 여자친구와 동료들이었다. 특히 결혼을 약속하고도 기약 없는 유학길을 지지해 준 여자친구는 내 멘탈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다.
미국 박사 과정 1학기가 끝난 지금,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주변을 보면 AI다, 반도체다 하며 억대 연봉을 보장받는 분야로 떠나는 똑똑한 친구들이 많다. 나 역시 코딩과 머신러닝을 공부했고 퀀트 프로그램을 짜보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학사 전공을 좀 더 살려보고 싶고 내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석사 전공과도 다른 'Meat Science'를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부럽다. 친구들의 높은 연봉이 부럽고, 안정적인 생활이 부럽다. 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힘들지 않다면 위선일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요즘 <흑백요리사>를 통해 셰프들의 예술이 각광받는 시대다. 나는 그 화려한 무대 뒤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의 근원적인 가치를 탐구하고 싶다. 더 경제적이면서도 맛있는, 인류에게 필수적인 단백질원을 연구하는 'Meat and Food Scientist'. 이것이 나의 현재의 목표이다.
박사(Ph.D.)는 'Doctor of Philosophy', 즉 철학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기술자가 아니라, 나만의 철학을 가진 연구자가 되고 싶다. 훗날 은퇴할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옛날 학회에서의 노교수님처럼 내 연구와 삶에 대해 아이처럼 신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 싶다.
이곳 브런치에 남기는 글들은 그 철학을 완성해 가는 '수련 일지'로 여길 것이다. 정답은 없을지라도,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이 먼 훗날의 나와 내 가족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