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없는 자들이 스스로를 달래는 방식
회사 업무로 온라인 미팅 통역을 할 때가 많다. 캐나다인 참가자들을 보면, 프로필에 얼굴 사진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나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 사진을 올려두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 사진들은 그 사람의 직업적 정체성이라기보다, 가벼운 자기소개에 가깝다. 반면 일본인들은 대부분 정말로 진지하게 자기 얼굴 사진을 올려둔다. 웃음기 없는 증명사진 같은 표정이거나, 아예 아무 사진도 없는 경우도 많다. 사진이 없을 경우 Microsoft Teams는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이니셜을 대신 표시하는데, Tom Hanks라면 TH처럼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일본 이름은 한자 두 글자로 표시되어 묘하게 우스꽝스럽다. 오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라면 大翔처럼 나오는 식이다.
나는 외국인이지만 아시아인이고, 일본어 통역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 사이에서 외국인으로 대우받기보다는, 일본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일본인 사이의 공기를 읽으며 일본인처럼 행동할 것을 은연중에 기대받는다. 그 결과 나는 Teams에 고양이 사진을 올릴 수 없고, 나 역시 진지한 표정의 얼굴 사진을 올려야 한다. 일본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이긴 하지만 일본 사회의 ‘암묵의 룰’을 이해하고 따를 것을 기대받았고, 그렇게 행동할 때 나는 외국인이나 손님이 아니라 그들 그룹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특별 대우는 없었지만, 그만큼 거리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편입에는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따른다.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배타적인 발언을 내 앞에서도 서스럼없이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당연히 맞장구를 쳐 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나는 한국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이 내가 없을 때는 한국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과 함께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정색하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분위기를 깨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택시 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택시운전사가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중국인 승객이 쓰레기를 차에 놓고 간다거나 매너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외국 경험이 없는 지방 출신일 경우가 많고, 대도시에 사는 엘리트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더라”거나, “일본인도 거품경제 시절에 시골 농협 단체여행으로 해외에 나가 추태를 부렸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는 식이다. 논박이 아니라, 일반화를 조금 느슨하게 만드는 방향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차별적 발언이나 혐오 발언은 때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료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신호를 빠르게 확인하는 도구가 된다.
이 구조는 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차별과 거의 항상 쌍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언어는 자화자찬, 흔히 말하는 ‘국뽕’이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스고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뽕이 대표적이다. 일본에 있을 때 상품 데이터 관리 업무를 하면서, 일본의 지방 경제 활성화라는 명목 아래 일본 각지의 상품 정보를 국제 표준에 맞게 정리해 해외로 발신하면 매출 증대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구상을 한 적이 있다. 마침 도쿄 올림픽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상품 정보의 다국어 제공 같은 아이디어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시작될 때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과도한 자기 확신이 발목을 잡곤 했다. 일본 제품은 품질이 좋으니 외국어로 정보만 제대로 전달하면 외국인 고객들, 특히 중국인들이 일본 제품의 우수함을 알아보고 몰려들 것이라는 전제가 당연한 듯 깔려 있었다. 일본 제품이 중국에서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업의 검증된 상품들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결과이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일본 지방 중소기업 상품에 외국인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회의 자리에서는 이런 전제가 진지하게 검증되지 않은 채, 일본은 특별하고 일본 제품은 기본적으로 우수하며 문제는 다만 외국인들이 그 가치를 아직 잘 모른다는 식의 일본인들끼리의 ‘일뽕’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종종 분위기를 깨는 말을 해야 했다. 외국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보를 영어로 번역해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나라의 유통 구조와 규제를 이해해 법적으로 판매에 문제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식품이라면 성분 규제와 라벨링 기준이 다르고, 공산품이라면 안전 인증과 책임 소재가 먼저다. 설령 정보가 준비되어 있더라도, 유통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지 파트너를 찾고 법률·규제 상담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일본 것은 좋으니까 팔릴 것”이라는 믿음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나는 차별과 자화자찬이 방향만 다를 뿐,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실무 현장에서 체감했다. 하나는 타자를 아래로 두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에 둔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외부 세계를 분석하기 위한 언어라기보다, 집단 내부의 불안을 완화하고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한 언어에 가깝다. 그래서 그 언어는 현실 검증을 쉽게 건너뛰고, 불편한 사실을 말하는 사람을 ‘공기를 못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 메커니즘은 온라인 공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 반대 의견은 침입자로 취급되며, 발언에 대한 현실적 책임은 거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차별과 자화자찬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결속 도구가 된다. 일본에서 혐한과 일뽕이 결합해 작동했던 구조와, 지금 한국에서 중국인 차별과 국뽕이 작동하는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한국의 경우 여기에 반공주의와 종교가 더해지며 구조는 한층 단단해진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공산주의에 대한 오래된 공포와 결합되고, 특정 종교적 세계관은 이를 도덕적 확신의 언어로 포장한다. 이때 차별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정의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는 옳고, 저들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틀이 아니라, 내부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특히 이런 언어는 외부와 교류한 경험이 많지 않고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안정제로 작동하며, 더욱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세상이 당장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언어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해 쓰이는 언어인지를 이해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끌려가지는 않을 수 있다. 그 정도의 거리만 확보해도, 그 구조는 조금 느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