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방법을 몰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본어

문자와 소리가 분리된 언어의 풍경

by 쿨파스

캐나다에서 대학 시절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일본 TV 프로그램을 영어로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VHS 테이프를 받아 와서 화면에 찍힌 타임스탬프를 기준으로 대사를 영어로 옮겨 적고, 이를 워드 파일로 정리해 리라이터에게 넘기는 방식이었다. 이후 그 번역문은 자막용이나 더빙용으로 다시 다듬어졌다.


1시간짜리 방송 하나를 번역하면 200달러를 받을 수 있었고, 하루에 한 편 정도는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 신분으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이때 번 돈으로 1997년에 한국에 가서 통역대학원 진학 준비를 했고, 199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누가 이런 일본 방송들을 영어로 볼까 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그 회사는 홍콩계 매니저가 운영하고 있었고, 막연히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혹은 홍콩 등지에서 일본 TV 프로그램 영어판에 대한 수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아직 보급되기 전이라 낚시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물고기 이름을 영어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도 한계가 있었고, 확신이 서지 않아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았다. 골프 토너먼트 같은 프로그램을 번역할 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선수 이름이 한자로만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학 시절 동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던 노교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일본인 교수에게 일본인 이름의 읽는 법을 물어보면,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본에 살면서도 이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안에 있는 동네 이름들은 한자로 쓰여 있어도 읽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그 지역에 가서 교차로에 세워진 표지판을 보고, 그 아래 병기된 로마자를 통해서야 처음으로 읽는 법을 알게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식 차이를 뚜렷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은 어떤 지명이나 단어를 보고, 그것을 어떻게 읽는지 모른 채로 넘어가는 상태를 상당히 불편하게 느낀다. 읽지 못한다는 것은 곧 이해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인은 읽는 법을 모르고 지나가더라도, 그것이 당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일본의 유조차다. 주유소로 휘발유나 경유를 운반하는 탱크 트럭의 앞면에는 위험 표시로 ‘危’라는 한 글자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 글자를 두고 생각해 보면 묘한 점이 있다. 이것을 음독으로 기(き)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뜻풀이로 아부나이(危ない)라고 읽는 것이 맞는지 분명하지 않다. 보는 사람도 굳이 그 답을 확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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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이 글자를 보는 순간, 위험하다는 의미 자체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읽지 않았지만, 이해는 이루어진다. 즉 여기서의 ‘危’는 더 이상 소리로 읽히는 문자가 아니다. 시각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에 가깝다. 문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모티콘에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일본어에는 이미 다 알고 있는 한자로만 구성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관례적인 발음을 모르면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업계별 전문 용어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진다. 내가 일본 유통업계에 종사했을 때 자주 접했던 단어 중 하나가 ‘帳合’였다. 소매업체가 계약을 맺고 거래하는 도매업체를 가리키는 말로, 장부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 단어는 ‘ちょうあい(초아이)’라고 읽는데, 앞의 글자는 음으로, 뒤의 글자는 뜻으로 읽는 방식이다. 사전을 찾아보거나 업계 경험이 없으면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토목업계에서는 흙을 쌓아 올린 것을 ‘盛土’라고 하는데, 이것은 ‘もりど(모리도)’라고 읽는다. 여기서는 앞의 글자를 뜻으로, 뒤의 글자를 음으로 읽는다. 업계 지식이 없는 일본인이 이 단어를 처음 본다면 두 글자 모두를 뜻으로 읽어 ‘もりつち’라고 읽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미 다 알고 있는 한자인데도, 단어로 결합되는 순간 읽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인명과 지명에서는 이 현상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니이가타현 산조시에 거주할 때 ‘新光町’라는 동네가 있었고, 니이가타현 니이가타시에도 같은 이름의 동네가 현청 소재지로 존재했다. 하지만 전자는 ‘닛코초’였고, 후자는 ‘신코초’였다. 한자는 같지만 읽는 법은 달랐다. 이런 경우, 한자를 안다는 사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잘못 읽게 된다. 실제로 일본에 살면서도 어떤 지명의 발음을 계속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지역에 직접 가서 도로 표지판에 병기된 로마자 표기를 보고서야 그동안 발음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도로 표지판에 병기된 로마자 표기는 외국인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일본인에게 발음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고 느꼈다.


사람 이름의 경우도 비슷하다. 나는 대학 시절 토론토대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일본어로 된 한국 고대사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김유신이 金庾信이고, 연개소문은 淵蓋蘇文, 신라 장군 이사부는 異斯夫라는 한자 표기를 접했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사부의 성이 ‘이씨’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일본에서 출판된 책을 통해 한국 고대사 인물들의 한자 표기를 인식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 이름들을 일본어로는 어떻게 읽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일본인 독자들은 고대 인물들의 이름을 보면서, 굳이 그것을 어떻게 발음하는지까지 확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본인이 종종 한국어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을 접할 때가 있다.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제한되고 표현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일본인들 중 상당수는, 정작 자기 자신의 언어가 지닌 특이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보인다.


언어는 본래 소리에서 출발한다. 문자는 그 소리를 기록하고, 다시 시각 정보로 변환해 주기 위한 장치다. 말이 먼저이고, 글은 그 말을 붙잡아 두기 위한 도구다. 그렇다면 소리를 거치지 않고 뜻만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과연 문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문자라기보다는 그림이나 기호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이모지(Emoji)’라는 말 역시 일본어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휴대전화에서 한자 변환 기능을 활용해 만들어진 그림 문자가 그 시초였다. 문자처럼 쓰이지만 소리와는 무관한 이모지의 발상은, 어쩌면 ‘危’와 같은 한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온 일본어의 감각과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이와 닮은 현상을 또 한 번 강하게 느낀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한때 ‘키라키라 네임(キラキラネーム)’이라 불리는 이름들이 크게 유행했고, 이것이 사회 문제로까지 번졌다. 한자를 사용하지만, 그 한자를 보고는 도저히 읽는 방법을 짐작할 수 없는 이름들이다. 예를 들어 ‘달 월(月)’ 자를 써 놓고 외래어인 ‘루나(Luna)’라고 읽는다든지, 한자의 통상적인 뜻과 말음과는 무관하게 발음을 부모가 임의로 정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 입장에서는 독특하고 멋있어 보이는 이름이었을지 모르지만, 아이가 성장하면서 그 이름은 곧 불편함으로 되돌아온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관공서에서, 아무도 이름을 한 번에 제대로 읽어 주지 못한다. 매번 발음을 설명해야 하고, 틀리게 불리는 일을 반복해서 겪는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개명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등장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작명 감각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본어가 오랫동안 허용해 온 언어적 관습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즉, 문자를 보고 읽는 법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의미만 전달되면 일단 넘어갈 수 있다는 감각이다. 이름이라는, 원래는 반드시 불리고 발음되어야 할 언어 요소마저도 그 규칙에서 예외가 되어 버린 셈이다.


한국어에서는 이런 일이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한글로 쓰인 이름은 보는 순간 발음이 확정된다. 마음대로 다른 소리를 부여할 여지가 없다. 반대로 일본어에서는 한자가 의미 중심으로 기능해 온 역사가 길다 보니, 이름조차도 ‘어떻게 읽히는가’보다 ‘어떤 글자를 썼는가’가 우선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키라키라 네임 논란은, 일본어에서 문자와 소리의 연결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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