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외주화 한 서구 사회

어떻게 ‘일하기 싫은 욕망’을 제도와 규칙으로 만들었는가

by 쿨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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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를 보면 “일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 유난히 솔직한 것 같다. 금융업의 발달, 지적재산권의 강화, 자본의 금융화는 모두 이 욕망을 제도화한 결과처럼 보인다. 노동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가능한 한 빨리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돈이 사람을 위해 일하게 만드는 구조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과거를 돌아보면 동양과 중동에도 수많은 발명과 사상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서양으로 전파되어 서양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인쇄술까지 예외가 아니다. 다만 그 시대에는 아이디어를 “돈을 내고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사상과 문학은 베껴 쓰이고, 퍼지고, 판매되면서 살아남았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많은 고전 문학 작품들 역시 저작권 덕분이 아니라, 복제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 사회 역시 처음부터 “불로소득”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 즉 고리대금은 오랫동안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돈은 그 자체로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부당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다시 말해 서구 역시 한때는 “노동 없이 소득을 얻는 것”을 윤리적으로 의심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서양은 결국 욕망을 억누르기보다는, 그것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이자에 대한 금기는 완화되었고, 금융은 정교해졌으며, 지적재산권은 법적으로 보호되기 시작했다.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어디까지가 내 권리인지 처음부터 명확히 규정하려는 태도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지적재산권은 그 태도가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된 제도다. 한 번의 창작으로 반복 노동을 최소화하고, 권리는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려는 발명이다.


한편 이런 사고방식은 언어에도 스며들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 영어의 관사를 보며 왜 물건 하나에 그렇게 집요한 구분이 필요한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사과가 하나인지 여러 개인지, 이미 언급한 사과인지 처음 등장한 사과인지, 내 사과인지 남의 사과인지—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미리 확정한다. 이것 역시 욕망을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애매함을 남기지 않고, 소유와 대상을 사전에 확정해 두고 싶은 욕망이 언어 구조에까지 반영된 것이다.


예전에 내가 우버를 운전하며 수입을 늘리기 위해 라이더쉐어 관련 유튜브 채널들을 찾아봤는데, 거의 빠지지 않고 반복되던 말이 있었다. Work smarter, not harder. Work smarter는 맞는 말이다. 문제는 not harder였다.


동양권에서 “work hard”는 선택지가 아니라 기본값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미덕 이전에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work smarter는 일을 덜 하자는 말이 아니라, 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더 나은 성과를 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내가 본 서구권 맥락의 not harder는 분명히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가능한 한 덜 움직이고, 덜 일하고, 시스템의 틈을 찾아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여기서 노동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최소화해야 할 비용이다.


일본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에 서 있는 사회처럼 보인다. 일본 사회는 노동의 가치를 지나칠 정도로 신성시한다. 단순히 “열심히 일하라”는 수준을 넘어, 노동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 이유처럼 취급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결과, 때로는 work smarter라는 개념조차 본능적으로 거부된다. 요령을 부리거나 효율을 따지는 행위는 성실하지 못한 태도로 오해받기 쉽다.


이런 태도는 은퇴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구 기업의 직원들이 은퇴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반면, 일본의 많은 직장인들은 은퇴 이후를 불안해한다. 할 일이 없어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정년퇴직 후에도 계약사원이나 촉탁직으로 재취업을 원한다.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가족들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구박을 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노동이 소득의 수단을 넘어, 사회적 정당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동시에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일본 사회는 노동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에 가깝게 다룬다. 일을 통해 돈을 번다기보다,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된다. 그래서 효율이나 생산성보다도 “얼마나 성실하게 오래 버텼는가”가 더 중요한 가치로 남는다. 노동을 줄이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타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서구와 일본은 서로 다른 극단에 서 있다. 서구는 노동을 최소화하고 소유와 권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켜 왔고, 일본은 노동을 신성화함으로써 오히려 효율과 재설계를 경계해 왔다. 한쪽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이상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를 정상으로 삼는다.


이 사고방식은 글로벌리즘에서도 반복된다. 서구 사회가 구축한 글로벌 시스템은, 어렵고 힘든 육체 노동과 환경 부담은 아시아와 제3세계에 떠넘기고, 자신들은 그 결과물을 값싸게 소비하고 향유하는 구조 위에 서 있었다. 제조, 조립, 위험한 노동은 외주화하고, 금융·브랜드·저작권·플랫폼만을 소유한다. 노동은 남의 몫이고, 수익은 자신의 몫이 되는 구조다.


그러나 이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하면, 서구는 늘 새로운 게임의 룰을 들고 나온다. 자유무역이 불리해지면 보호무역을 말하고, 글로벌 분업이 흔들리면 안보와 가치의 이름으로 규칙을 바꾼다. 기술 격차가 좁혀지면 특허와 규제를 강화하고, 제조 경쟁력이 위협받으면 보조금과 제재를 동원한다. 룰은 고정된 적이 없었고,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설정되어 왔다.


이 맥락에서 불법 복제를 둘러싼 분노도 다시 보게 된다. 불법 복제를 “도둑질”이라며 격앙되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아이디어와 창작물이 본질적으로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그 소유가 왜 영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는가? 저작권과 특허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자연권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의해 허용된 한시적 독점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창작을 장려하기 위해 일정 기간 보상을 허용하지만, 결국 그 성과는 공공의 자산으로 환원된다. 제도 스스로가 아이디어의 소유는 영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서양 문명은 “노동 없이 불로소득을 최대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그 욕망을 금융, 지적재산권, 글로벌 분업, 언어, 그리고 국제 규칙 속에까지 일관되게 반영해 왔다. 때로는 진보의 언어로, 때로는 도덕의 언어로 포장되었지만, 방향은 크게 달라진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인식의 문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제도와 규칙이 보편적 가치인지, 아니면 특정 문명이 자신들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 온 임시적 장치들인지를 묻는 문제다. 서양 문명의 강점은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솔직함을 언제까지 중립적 가치로 착각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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