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기 기억
장마철이다. 어제도 비가 종일 내렸는데, 내일도 모레도 비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의 날씨는 참으로 오묘하다. 봄에는 바람이 여름에는 비가 가을에는 햇살이 겨울에는 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기억 속에 그 모습은 감정과 생각, 정서로 존재한다.
비는 언제나 내 좋은 친구이다. 누구는 비가 오면 외출하기 싫다고 하는데, 나는 비가 오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 비와 함께 하고 싶고 비의 품에 안기고 싶어 진다. 솔솔 내리는 비도, 장대 같은 비도 그 모습은 바뀌어도 좋다,
나의 초기 기억은 언제나 비로 시작한다. 초기 기억은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상담기법 중 하나이다. 어린 시절에 가진 삶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초기 기억의 단서는 심리치료에서 중요하다. 초기 기억에는 경험한 사건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억 중 선택된 초기 기억은 나의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힌트가 된다.
비에 대한 첫 기억은 6세쯤이다. 내 기억에 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당당한 아이였다. 그때 내가 견딜 수 없어한 것은 차별과 편애였다. 할머니는 나를 싫어하셨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였고 사사건건 시비를 따지는 성격 탓이었다. 할머니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것이 기억난다. 바짝 성난 맵고 작은 고추처럼 빨간 맛을 뿜어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4대 독자였던 아버지에게 아들이 어서 태어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딸이 나란히 태어났다. 하나 둘 셋. 첫째는 손이 귀한 집안에 찾아온 첫 생명이라 아쉬웠지만 고마우셨을 거다. 그런데 2년 후 찾아온 둘째는 기대와 달리 여자아이였다. 의사는 아들일 것을 장담했다고 한다. 그러니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나를 처음 본 할머니는 확인할 것만 확인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3년 후 또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다시 3년,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내 기억은 이때부터 존재한다. 남동생이 태어난 후로 모든 것은 남동생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특히 나와 여동생은 존재감이 없었다. 언제나 불평·불만이 많았던 것은 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나의 18번 멘트.
“왜 나만 미워해? 엉엉엉.”
그럴 때 나는 쫓겨났다. 여러 번 쫓겨났을 텐데, 비 오는 날을 잊을 수 없다. 비가 내려도 어림없이 쫓겨났다. 갈 곳이 없던 나는 처마 밑 30센티 정도의 공간에 비를 피하고 서있었다. 격노로 씩씩대며 서 있던 나에게 비와 추위는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검은 구름이 보이고 손을 내밀어 비를 만지고 흘려보내고 아귀에 모아보기도 한다. 발에 닿는 비를 피하려고 움츠리다가 흙에 새겨진 내 발자국을 바라본다. 물이 고이는 발자국을 가지고 논다.
한참을 비와 논다. 세상에는 비와 나만이 있다. 분노는 억울함과 슬픔을 데리고 사라지고 빗소리와 비릿한 흙냄새 손에 닿는 간지러움이 나를 감싼다. 비는 어린 소녀의 친구가 되어 위로를 건넨다. 비가 나의 분노와 슬픔, 외로움을 모두 씻어냈나 보다. 비가 잦아들며 평화가 찾아온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당당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다시 쫓겨나도 비가 나를 친구 해줄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비의 랩소디, 가장 외롭고 처절했던 극적인 순간에 나는 자유로울 수 있었고 강력한 힘을 얻은 아이가 되었다.
상담대학원에 진학하고 초기 기억을 처음 꺼낼 때는 온통 슬픔이었다.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열면 눈물이 먼저 나왔다. 사고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보다 앞서 감정이 신체로 나온 것이다. 그때 비는 나에게 슬픔이었고 아픔이었고 상처였다. 하지만 초기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비를 만난 어느 멋진 날의 기억이 돌아왔다. 누구보다 멋진 내 친구, 무엇보다 큰 품으로 나를 안아준 내 친구.
그래서였구나,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픈 기억이어서가 아니라 위로받고 평안을 받은 기억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비가 오기 전 신호를 잘 알아차린다. 눈보다 코로, 피부로 먼저 느낀다. 그리고 시원한 기분을 느낀다. 정체된 것들이 씻어 내려가는 기분에 순수해지고 착해지는 기분을 경험한다.
혼자인 것이 좋고 편할 때가 많다. 어쩌면 가장 자유롭고 편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서는 아마도 나의 초기 기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여야 하는 사람, 나는 혼자일 때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나의 기억 저편에 만들어 놓은 나의 생활양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자연을 좋아하고 큰 품을 찾는다.
오늘은 딱 그런 날이다. 비를 품은 구름이 몰려온다. 빗소리의 평화와 흐린 날이 주는 차분함을 가지고 온다. 그러면 나는 비가 오면 파전을 기다리는 남편을 위해 부침개를 준비한다. 때로는 오랜 친구 비를 만나러 친구와 찻집을 찾고 비의 랩소디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