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과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는 것
세 가지 계획
어린이집 아이들의 우는 소리 싸우는 소리 속에서 내 젊은 시절은 수많은 아이들의 엄마로 살았다. 때로는 다친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을 쫓아다녔다. 물놀이 중에 미끄러져서 뇌골절을 입은 친구나 모서리에 부딪혀서 입술과 턱이 반으로 갈러져서 피가 펑펑 나는 친구를 데리고 달릴 때는 마음이 무척이나 초조했다.
서른이 되었을 때 나의 일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워내면 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사회 전체가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줄곧 그 일을 했던 나는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직장 가는 엄마들을 배려해서 아침에 자는 아이를 안고 오면 집처럼 실컷 잠을 재운 후 아침도 먹였다.
가끔씩 아이들 때문에 직장을 포기하려는 엄마가 고민을 얘기했다. 경력단절 후 나중에 엄마가 필요없어지는 나이가 되면 허망할테니 아이는 잘 키워준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를 했다.
엄마가 직장 관계로 이틀 일하고 이틀은 집에 있는 친구도 있었다. 엄마가 없는 이틀은 초등학교 저학년 누나가 동생을 챙겨서 데리고 나와야 했다. 잠이 많은 어린 누나가 동생을 챙기기는 어려웠다. 아침마다 차량운행을 가서 그 아이를 깨우고 옷을 입혀 차량에 태워가서 밥을 먹였다.
교육비가 없는 아이들은 무상으로 교육과 돌봄을 제공했다. 마음이 아픈 엄마에게는 어린이집 음식을 싸가지고 가서 먹이기도 하고 상담도 해주었다.
한번은 하원을 해서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엄마가 나오지 않는다.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혹시나 우울한 마음에 잘못된 선택을 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네에 사는 그분의 형제를 불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느라고 전화 소리도 벨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그 일을 하늘이 준 나의 사명이라 여겼기에 기쁘게 일했다.
대학원 진학을 하며 첫번째 인생 계획이었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게 되었다.
열심히 잠도 안자고 공부를 하던 중 너무 무리한 탓에 암투병이 시작되었다. 항암치료 후 1년이 되었을 때 "내가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학창시절 꿈이었던 글을 열심히 쓰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도 수년이 지났는데 공부하느라 제대로 쓰지 못했던 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한 편씩 시가 완성될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내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시모임을 나서려면 진통제를 먹고 겨우 발걸음을 떼어 서울까지 오가는 길에 걸리는 시간만 네 시간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암치료로 백지가 된 머리가 기능을 못해서 먼저 오는 전철 아무거나 타서 인천까지 수도없이 갔다가 되돌아왔다. 깜깜한 늦은 밤 낯선 동네의 전철 긴 레일을 난감한 이방인처럼 바라보는 것도 야릇한 감흥이 있었다.
그렇게 쓴 시들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내가 투병생활을 이기고 이땅에 있을지 때로 슬퍼졌다. 첫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 그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나의 두 번째 인생계획이었던 글을 쓰며 감사하게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 번째 인생계획을 위해 십 육년 전 쯤 낮에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야간에는 노인복지대학원을 다녔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은 잘 키우고, 어르신들에게는 주변과 잘 이별하고 죽음을 공포스럽지 않게 준비하는 일을 해주고 싶었다.
어린이집과 요양원을 마주보고 독립된 건물로 지어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서로 재능기부도 하고 텃밭도 함께 가꾸는 일을 계속 꿈꿔왔다.
건강이 따라준다면 세 번째 인생계획은 요양원 어르신들의 엄마가 되는 것이다. 너무 무섭지 않게, 너무 슬프지 않게, 잘 살다가 오라고 사랑의 귓속말로 남은 자녀와 지인들에게 속삭여줄 수 있는 따스한 마무리의 역할을 해주고 싶다.
내 젊은 날은 어린이집 아이들의 엄마였지만 내 중년은 어르신들의 엄마로 사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내 오랜 세 번째 계획이다.
어린이들과 어르신들은 영혼의 순수함이 너무도 닮았다. 무엇이건 주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그들이 수용하는 행복지수가 달라진다는 점이 또 닮았다.
신이 내게 그런 수많은 어르신들의 좋은 엄마가 되는 기회를 주시기를 간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