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순 있어도 없어지지 않는 기억
하루 걸러 하루 맑았다 흐려지는 날들에 날씨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하늘을 자주 바라보고, 야외 작업을 기대하며 올려다보는 나는 두껍게 껴입지 않아도 노트북을 메고 걸어 나올 수 있는 온도와 미세먼지 '양호' 이상이면 정해진 일처럼 걸어 나온다.
구름의 명도.
흐린 하늘도 빤히 바라보면 흰 페인트를 훅 부어놓은 게 아니라 중간중간 먹구름도 져있고, 구름 간의 고저가 느껴지기도 한다. 비행기를 타고 아주 맑은 나라에서 이륙해서 구름 사이를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퐁신퐁신 덩어리 져 미끄럽기라도 할 것처럼 생겨서는 맥없이 지나쳐가는 수증기의 덩어리가 신기하면서도 허무했다. 새카만 밤에는 난기류를 만나면 무서운데 이렇게 보니 그냥 지나쳐 가지고 우리는 갈 길을 가면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느끼다 보면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가도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고 평안해졌던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고통은 나도 모르는 새에 쉽게 잊히고, 내 일이 아니면 결코 본인 일처럼 고통스러울 수 없다. 화장실이 급해 끙끙대는 누군가를 보아도 본인만큼 곤란할 수는 없다.
모델 한혜진 님이 유튜브에서 고민상담을 하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어떻게 견뎠냐는 질문에 그것이 지금의 내 커리어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라고 답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안정된 20대라는 말이 애초에 있냐고 되물었다. 40대가 되어도 불안정함은 여전하지만, 살아온 날만큼 꺼내쓸 수 있는 무기가 다양해서 의연히 대처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어른이 되는 건 고통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에 가까운 걸까? 서글픈 마음이 드는 한편, 이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그가 살아온 삶이 곧 자기 자신을 증명한다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는 고집스럽고 꼰대라고 하겠지만 그가 경험한 것이 그를 지금껏 무사히 살아내게 했으므로 또 어떤 증명이 더 필요할까?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인생 선배들이 모두 멋있게 느껴진다. 올드 바이브!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진 요즘,
왜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이 감성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다시 찾게 되는 걸까 생각해 본다.
아날로그키퍼의 문경연 사장님은 브랜드 이름에 들어가는 '아날로그'를 온기가 머무는 것이라 정의했다고 한다. 시간이 더 걸리고, 조금 더 움직이고 성가시게 챙겨야 하는 그 틈과 머무름에 마음이 담긴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머무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따뜻했나라는 생각부터 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메시지, 지금을 만끽하며 살자는 좌우명에 가까운 단어가 아닐까. 멋진 장소가 있다면 사진을 찍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단 한 장면을 남긴다면 이곳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바지의 얼룩 따위는 개의치 않고 털썩 앉아버리는 것. 아무렴 깔끔히 나를 보살피는 일은 평소에 잘하더라도,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정말로 대부분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다. 2023년 4월 20일 오후 4시는 평생 지금 뿐인 것도 맞다.) 순간을 심혈을 기울여 셔터를 누르고, 빛과 초점을 고려한 짧은 영상 컷을 찍고, 좋아하는 글귀와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곁들여 또 행복했다는 평생의 행복 구슬을 하나 적립하는 것.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온 것처럼 천진하게 누리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내게 아날로그는 기억인 것 같다. 내게 없는 추억도 그리워할 수 있으니 썩 마음에 든다.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 장난감, 놀이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인기를 끄는 것도, 정말 좋아한다면 직접 만나고 싶고 헤어지자마자 또 보고 싶은 연애감정도 다 '아날로그'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