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피리 Aug 05. 2021

소녀가 이루어낸 불빛

성냥 팔이 소녀

"소녀야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네게 끝이 온 것 같은 바로 그때가 시작임을 기억해야 한다”


할머니는 소녀의 볼을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매만지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소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그 거칠함이 할머니의 부드러운 눈빛, 따뜻한 품과 더욱 대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어두운 세상이 너무 까끌거려 할머니가 나를 보호해주느라 부드러움이 닳아버린 걸까 하고 생각했다. 느껴지는 저릿한 마음으로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배운 소녀는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 걱정 마세요. 포기하지 않을게요"

“아가 너는 정말 특별한 성냥을 파는 소녀가 될 거야”




할머니가 소녀의 곁을 떠난 이후로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이 반복적으로 소녀를 괴롭혔지만 소녀는 할머니와 약속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술에 취한 아버지의 폭언은 소녀를 너무나 주눅 들게 했고 소녀의 의지나 다짐을 점점 약하게 만들곤 했다.


"너는 정말 도움이 되는 게 없구나. 쓸모없는 존재 같으니! 이까짓 성냥으로 도대체 뭘 하겠다고!"


아버지가 뱉은 말 중 유독 이 말은 공기에 흩뿌려지지 않고, 공기 속에 소녀와 함께 갇힌 것 마냥 소녀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가볍게 날아가지 않는 말이라면 그 말 위에 올라서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의 거칠한 손을 상상하며 얼굴을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촉감은 소녀를 더욱 슬프게 할 뿐이었다.


"아버지 이제 그만 멈춰요. 그 말들에 나는 너무 많이 다쳤어요"

"네가 어딜 다쳐? 하여간 엄살은"


소녀는 그동안 수없이 다친 마음이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자신의 손과 멀쩡한 듯 보이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할머니가 어릴 적부터 왜 그토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주었는지 소녀는 이해가 되었다.


"할머니. 너무 보고 싶어요... 나 같은 아이가 정말 이겨낼 수 있을까요?"


소녀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성냥개비를 손에 꼭 쥐며 온 마음으로 할머니를 느끼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소녀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은 허기를 해결해줄 빵 한 조각이나 따뜻한 난로가 아닌 할머니의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녀는 할머니의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성냥개비를 켜서 작은 불빛을 보여주던 할머니의 눈에는 빛과 함께 소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소녀야. 이 불빛은 때가 되면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날 거야. 성냥개비도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 때가 언제예요?"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 때, 너는 바닥을 딛고 날아올라 밝은 빛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야"

"할머니 그 때를 꼭 기다려야 하나요? 지금은 안돼요?”

"소녀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지금은 그냥 성냥이지만 그때가 되면 아주 의미 있는 성냥이 될 거야. 성냥개비는 큰 고통을 이겨낸 자에게 커다란 빛을 선물한단다. 비단 성냥개비뿐만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지"

"그럼 제가 그 빛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이의 마음에는 허전한 공간이 있으니, 그곳을 밝혀주는 특별한 성냥팔이 소녀가 되렴"

"그럼 할머니 마음을 제일 먼저 밝혀줄래요"

"할머니 마음의 방에는 소녀가 있어서, 그 불빛이 필요 없단다. 소녀가 빛 그 자체잖니. 고마운 아가"


선명한 할머니와의 기억으로, 소녀를 폭언과 함께 가두었던 공기는 비가 되어 흩뿌려져 내렸다. 소녀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아버지가 소녀가 벗어나야 할 마지막 올무임을 깨달았다. ‘그래. 아버지를 떠나자’ 소녀는 스스로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그 끝을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성냥개비 한 아름을 바구니에 담으며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야. 나는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 나의 어둠도 세상의 어둠도 밝혀줄 거야”




남은 것은 성냥개비뿐이었지만, 소녀는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끝이자 시작을 스스로 찾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더불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니 선물처럼 샘솟는 용기가 신비로웠다. 이제 소녀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어둠을 밝혀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며 바쁘게 지나다니는 어른들 틈에서 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해보았다. 그러다 한 상점 앞에 운명처럼 우두커니 섰다. ‘바로 이거야!’


소녀가 멈춰 선 곳은 성냥 가게였다. 잔뜩 쌓여있는 색색깔의 성냥과 함께 소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데스크를 지키고 있는 주인의 슬픈 눈이었다. 주인을 첫 번째 고객으로 정한 소녀는 심호흡을 한 뒤 마음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성냥 사세요!”

대뜸 문을 열고 들어와 이렇게 외치는 소녀를, 가게 주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소녀야. 여기가 바로 성냥 가게란다. 성냥 살래요를 잘못 말한 거 아니니?"

“아니요! 아저씨 제가 켜는 성냥은 특별해서 가게 어디에도 없을걸요? 마음을 밝히는 성냥이거든요!”

주인은 귀엽다는 듯이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것을 사주마. 성냥은 더 이상 필요 없단다"

소녀는 특별한 성냥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주인을 위해 자신의 성냥 하나를 켜주었다. 주변이 찬란하게 환해지자 주인은 놀란 표정으로 소녀에게 다가왔다.


“소녀야 이 성냥은 왜 이렇게 밝은 거니?”

“어둠을 먹고 더 밝아졌거든요. 제가 말했잖아요! 아주 특별한 성냥이라고. 가까이 와보세요”

주인은 소녀에게 다가가 불빛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저씨 보여요?"

“돌아가신 어머니... 나 때문에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이는구나..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니?”

"아저씨.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대요. 춥고 불이 꺼진 그 공간을 밝혀주는 것이 이 성냥이에요. 아저씨에게 그 공간은 어머니로군요"

"소녀야 너도 우리 어머니가 보이는 거니?"

"아니요. 저는 할머니가 보여요"


주인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세상에… 소녀야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 내가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으셨을 거야. 이렇게라도 다시 보니 너무 행복하구나"


소녀는 연이어 다음 초를 켜서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어머니가 사주신 노란색 우산을 잃어버려 빗 속에서 엉엉 울고 있는 어린 소년이 보였다. 어머니는 다가와 그를 꼭 안아주고는 울음을 멈출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어느새 울음소리가 사그라들고,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선선한 공기에 무게를 싣자 어머니는 말했다.


"아가. 살다 보면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사라질 때가 더 많단다. 네 탓이 아니야"


주인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다 타버린 성냥을 손에 꼭 쥔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야. 네 말이 정말 맞구나. 나는 늘 어머니가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하며 매일을 괴로워했단다. 덕분에 어머니를 만나 위로를 받았어”

"아저씨의 어두운 마음의 방이 환해졌네요"

"고맙다. 내가 이 성냥을 모두 사마"


소녀는 첫 고객이 된 주인을 행복하게 바라보며 마음으로 잡은 할머니의 손을 꽉 쥐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래 무엇이든”

“아저씨가 제 첫 번째 고객이자 제 꿈을 이루는 시작점이 되어줄래요?”


주인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다 수많은 성냥을 바라보는 소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곤 흐뭇하게 웃었다.

“소녀야 더 많은 성냥이 필요한 거구나”

“네! 세상은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해요. 함께해주세요”


주인은 소녀를 따뜻하게 품에 안고 대견하다는 듯이 얼굴을 매만져주었다. 거칠한 손이 볼에 닿자 그동안 참아온 소녀의 눈물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