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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May 05. 2024

동백아가씨

엄마의 목소리

지리산 온천, 산수유, 화엄사 가는 길, 17번 국도를 따라 구례 쪽으로 한참을 달리면 엄마의 품처럼 따스한 지리산 자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행이란 단어도 생소했던 어린 시절, 우리 가족들의 여행이란 그저 공기 좋고 나무들이 많은 산으로 바리바리 먹을 것 잔뜩 싸들고 나서는 힘들지만 유쾌한 그런 소풍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여행길인지 고생길인지 애매한 출발의 목적지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이었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는 아예 텐트까지 동원해 1박 2일로 계획을 짜고 부모님 포함 오빠, 언니들까지 대가족 이 지리산의 화엄사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아빠와 달리 나들이를 좋아하는 엄마는 얼굴에 연신 웃음꽃을 피운채 하루종일 즐거워하셨다.

얼음보다 시원한 계곡에 몸을 담그고 사진을 찍고 자식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좋으셨던 거다.

자식들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며 언젠가 내려간 시골집에서 엄마는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운동삼아 걷고 계셨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속에 그려둔 큰 그림도 무색하게 그 이듬해 엄마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달을 병원에 계시다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어 시골집으로 퇴원하신 엄마.




그때부터 고향은 나에게 아픔이 되었다.

엄마가 다니시던 동네의 골목들, 엄마가 잘 가꿔놓은 우리 집의 아기자기한 텃밭, 엄마가 좋아하는 뒤꼍 장독대옆의 석류나무, 집안의 모든 생동하는 것들이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자 점차 생명력을 잃어갔다.

집에 누워만 있는 엄마가 안쓰러워 환자용 휠체어에 엄마를 앉히고 동네 어귀에 나갔는데 마을사람을 만나자 엄마는 당신의 그런 모습이 창피했는지 집으로 돌아가자는 눈짓을 나에게 보내왔다.

말을 잃은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걸 때면 적어도 세명의 딸 이름은 부르고야 전화를 걸어온 딸의 목소리를 파악했던 엄마는 더 이상 딸들의 목소리를 유추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더 이상 엄마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엄마의 전화를 받을 수도 없게 된 우리 남매들.

엄마의 목소리를 물려받은 목소리가 비슷한 우리 집 딸 들은 그 날이후 더 이상 엄마와 기쁨의 순간들을 주고받으며 웃을 수도 슬픔을 함께 나누며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게 말을 할 수 없게 된 엄마가 희한하게도 엄마가 좋아했던 이미자 가수의 '동백아가씨' 란 노래의 첫 소절을 누군가 시작하면 함께 따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노래와 고향집의 주소만큼은 첫마디를 꺼내주면 엄마가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엄마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엄마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면 엄마 옆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불렀고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 우연히라도 듣게 되는 '동백아가씨'는 엄마의 목소리로 둔갑되어 내 눈시울과 마음을 동시에 적셔댄다.


고향집을 다녀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출발하는 나의 차를 보며 손을 흔들던 엄마 아빠의 모습을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다 눈앞이 뿌해지던 그날도 더 이상은 오지 않을 날이 되었다. 

누군가 옆에서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퇴근길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지하철 안에서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을 닦아낼 수도 없었던 여러 날들.

차가워진 엄마의 종아리에 엄마가 좋아하던 색인 분홍색 양말을 힘껏 끌어올려 신겨준 며칠 뒤 3월의 어느 날 엄마는 편안하게 아빠옆에서 눈을 감으셨다.

이미 결혼적령기를 한참 넘긴 막내딸의 결혼을 그토록 원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 곁을 지키던 아빠가 그다음 해 같은 달에 우리 곁을 떠났을 때 나는 불효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하얀 눈이 꽃잎처럼 흩날리던 날에 떠나신 부모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그림자가 되어 여전히 나의 뒤를 보살펴 주시는 듯 느껴진다.




올해도 5월이 되니 다양하게 피어난 꽃들과 싱그런 녹음이 우거진 산과 들이 엄마를 대신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막내딸, 잘 살고 있지?" 

그 물음에 나는 엄마가 좋아했던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남편과 함께 동행하는 것으로 엄마가 듣고 싶어 할 대답을 대신해 보기로 한다.



                "엄마, 아빠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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