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했다
핑크색과, 회색가발을 쓰고, 검은색 망토를 두른, 또는 오래전 교복과 교련복을 챙겨 입은 몇몇의 아이들이 출근길 인도를 걷고 있었다.
각색의 코스튬을 걸친 아이들.
뭐지? 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졸업사진을 찍기 위한 복장인가 보다 생각했다.
예전의 졸업사진은 정해진 틀 안에서 일률적인 구도에 의해 찍힌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아이들끼리 직접 상의하고 콘셉트를 정해서 졸업사진을 의미 있고 생동감 있게 촬영한다고 한다.
나의 졸업사진은 어땠나 생각해 보니 잔디밭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정형화된 억지웃음을 웃었던 것 같다.
그 빛바랜 사진 속에 있는 나의 친구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다 가물가물해서 길을 걷다 마주쳐도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세월이 흘렀다.
중학교 아침 조회시간.
간단한 운동을 한 후 연단에 선 교감선생님의 공지사항 이 한참 동안 이어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루한 햇빛이 어느새 운동장을 점령해 버리면 몸이 약한 친구들 몇몇이 여기저기 서 픽 픽 쓰러지곤 했다.
연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숫자의 아이들이 쓰러져 준 덕에 이제 곧 연설이 끝나겠구나 우리들은 한시름을 놓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운동장에 서 있다 교실로 들어오면 우리들은 배가 고팠다.
1-2 교시가 끝나자마자 먹어치운 도시락에서 미처 휘발되지 못한 김치냄새의 잔향이 3교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의 후각을 벌름거리게 했고 우리들은 도시락 검사를 위해 책상 위에 도시락을 죄다 꺼내놓고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냄새나는 김치에 계란 프라이 한 개만 있어도 밥맛이 꿀맛이 되었던 한참 먹성 좋을 때의 우리들.
몇몇은 빈 도시락통을 들고 교무실로 가서 무릎을 꿇고, 수업을 위해 오며 가며 하던 선생님들은 교편으로 양은 도시락을 '탁 탁' 쳐대며 째려보는 눈빛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대신했다.
수업시간에 존다고 무릎 꿇고 문제 못 풀었다고 무릎 꿇고 그 시절 우리의 무릎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지금도 학교에서 무릎을 꿇리는지 궁금하다 갑자기.
우리 학교는 시골에 있었기에 부지가 상당히 넒 었고 특히나 운동장 왼편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숲은 점심시간이나 체육활동 시간에 잠깐씩 그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거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좋은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가장 신났던 건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몇 반의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든가, 몇 반의 누가 잘생겨서 인기가 많다든가 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이들의 큰 관심사인 연애사를 수업시간 종이 울리는 것도 모르고 쏙닥거리다가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하듯 앞다투어 뛰어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간신히 교실에 골인했던 것 들이다.
철없이 웃고 마냥 떠들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즐거웠던 우리들은 촐랑댕이 들이었다.
일요일 날 옆동네 친구집에 놀러 가다가 수박 밭에서 수박하나를 따서 먹었는데 친구집에 도착하니 우리가 수박서리 하는 것을 보셨던 친구 아빠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겁주고 놀려대며 웃으셨다.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고백하라고 학교 창고에 친구를 밀어 넣었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가버려해 질 녘까지 그 안에 갇혀있다 문 위쪽으로 난 좁은 창문을 통해 가까스로 빠져나온 친구가 우리를 보자마자 안도의 울음을 터트렸다.
석양이 붉게 내려앉은 시골길, 자전거 페달 위로 일어난 흙먼지에 앞서가던 친구들의 뒷모습이 흐릿해지고 조바심에 엉덩이까지 들썩여가며 바쁜 귀갓길을 재촉할 때, 친구들은 어김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발을 땅에 디딘 채 고개를 돌려 내가 그들 곁에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렇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동창회니 모임이니 친교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렇게 나의 순박하고 예쁜 시간 속에 존재했던 친구들을 잊어갔다.
친구들이 전부였던 우리들의 작은 세상.
그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런 무구한 우정을 나눌 친구들은 나의 마음 안에서만 살아 숨 쉬는 유형의 존재들이 되었다.
가녀린 몸매에 당찼던 미정이,
공부를 잘해서 수간호사가 되었다는 현지.
키가 작아 놀림을 받곤 했지만 얼굴이 예뻤던 현정이.
공부도 고만고만, 얼굴도 고만고만, 성격도 고만고만했던 나를 아껴줬던 나의 소중한 친구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