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 분명 한 5년은 지나서 얘기 꺼낼 거야.” 나도 모르게 발끈하여 곧바로 받아친다. “무슨 소리야. 비밀은커녕 숨길 거 하나도 없어.” 진심이다. 이십 년 지기 친구들에게도 꽁꽁 숨겨둔 비밀이 있다면 철저한 신비주의, 사연 많은 삶이겠지. 극기훈련 캠프파이어의 하이라이트 촛불 의식처럼 눈물 펑펑 감동의 모멘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가장 가까운 지인들조차 나를 ‘속 얘기하지 않는 애’로 생각하는 게 억울하다가도 정말 내가 그런가 자아 성찰, 아니 관찰의 시간을 갖는다. 그래, 난 음흉하게 속내를 감추는 게 아니라 마음이 너무 안쪽에 있어 상대와의 거리가 늘 멀게 유지된 사람이라서 야. 이런 나를 친구는 별명 하나를 지어주며 정의 내렸다. 김불편씨!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다른 사람과 상황을 불편하게 만드는 ‘불편러’가 아니다. 정반대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불편해하는 ‘김불편씨’라는 거다. 어떤 즉각적인 대응도 못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들킬까 민망한 웃음만 짓는다.
아무리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다지만 구내식당의 제육볶음과 소불고기 점심 메뉴 돌려 막기에 질리고 물려 버렸다. 코로나를 핑계로 구내식당 이용 횟수가 줄더니 아예 방문을 끊은 지 오래다. 점심시간에도 대부분 이동 없이 자리를 지키니 직원들과 짧은 대화마저 나눌 일이 거의 없다. 회의나 공지를 전하는 자리에서 의식하여 안부를 묻는 대화를 끼워 넣기 전에는 말이다. 요즘의 가벼운 화젯거리를 꺼내다 자연스레 MBTI를 묻는다. “전 어떨 거 같아요?”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차장님 일단 ‘I’는 확실해요.” 띠동갑 보다 더 차이가 나는 이십 대 직원 둘은 자신 있게 말한다. “땡! 아닌데요.” 놀란 듯 커진 눈에 그럴 리 없다는 의심의 눈빛이 잠시 스친다. 나도 진짜 나를 잘 모르는데 친밀한 교감 없는 회사 동료들이 나를 파악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처음부터 개인사를 여과 없이 말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구나 보다는 가벼운 사람인가 판단이 앞선다. 나에게 서슴없이 친근함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고마움보단 순간 내 안에 경보음이 울리며 그와 간격을 조정, 유지하는 방어 기제가 작동하고 만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 그렇다며 핑계처럼 응수하지만 여전히 난 말을 아끼고 감정의 되새김질을 하는 김불편씨인 거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가 아님에도 나를 스스로 정의 내리고 진짜 내 모습에 확신을 갖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40년의 삶을 살며 품은 과제를 앞으로의 40년 안에는 풀 수 있을까. 애정 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은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글은 그의 진정한 목소리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거짓된 목소리와 틀린 말은 버려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뒤늦게 또 뜻밖에 글쓰기 매력, 아니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진정한 자아 찾기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공백기 없는 직장생활 18년 차 여성, 10대 아이와 불혹의 내가 맞닥뜨릴 사춘기와 갱년기 중 뭐가 이길까를 상상하는 엄마, 결혼 13년 차 개인주의 강한 남편을 둔 아내,,, 나를 설명할 여러 수식어를 갖고 있음에도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여전히 명확하고 간결한 한 줄 답안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내 삶에 크게 미안한 일, 책임감 없는 거란 걸 깨닫는다.
사라지는 것과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 다르다. 지금의 김불편씨에게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다. 살아가며 만나는 이들과 가늘던 굵던 관계의 끈으로 실뜨기를 하다 풀어버리기도 하고 상대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기도 하니까. 죽음으로 내가 잊힌다 해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모든 순간 나를 기억해’라고 바랄 수는 없다. 가만가만 지내다 추억을 공유했던 교집합에 들어오면 나를 떠올리고 그 순간 사무치게 그리워해주면 충분하다. 단, 나 자신이 확실한 정의 없이 사라지는 것은 두렵다. 실체가 아닌 이미지로만 표현되는 것은 슬플 것 같다. 이미지가 최고의 생산재이며 소비재인 영상시대라지만 나 자신만은 이미지가 아닌 금속활자처럼 단단하고 분명한 존재이고 싶다. 김불편씨의 글쓰기는 거대한 선풍기 앞에서 나와 관련된 단어와 문장을 쏟아놓는 것부터 시작한다. 진실성 없는 가벼운 낱알 같은 표현들은 바람에 멀리 날아가고 알곡처럼 단단한 내 본연의 말들만 남는다. 난 그것을 포갠 두 손안에 소중히 담아 나의 진심ㅡ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하는 것, 부끄럽고 싫어해서 버리고 싶은 것ㅡ을 글쓰기에 뿌려놓으려 한다. 정말 내가 쓴 책이 나온다면 가장 먼저 김불편씨라 별명 지어준 친구에게 선물해야지. ‘나의 첫 번째 지정 독자님, 김불편씨에게 당신은 가장 덜 불편한 사람입니다.’이라 적어줄 테다.
May 14,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