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강의 시간, 렌즈가 내 눈을 향해 렌즈가 달린 시선추적(Eye Tracking) 기기를 조심스레 장착해 본다. 생각이 모조리 읽힐 거 같은 두려움에 눈동자는 얼음이 되었다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시선을 붙잡는 곳에 내 욕망과 의지가 있다. 세상의 모든 단어들이 끝없이 나열된 화면이 펼쳐진다면 지금 나의 시선은 ‘제2의 인생’ ‘투잡러’라는 단어에 한참을 머물며 큰 점을 그릴 것이다. 욕망하는 또 다른 내 모습,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가운데 두고 마인드맵을 그려본다. ‘18년차 직장인’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저장의 여왕’ ‘발없는 붙박이 귀신’ ‘아이스맨 차장님’으로 연결된다. 다른 굵은 한 줄기는 ‘겁나 빠른 진아씨’ ‘김불편씨’를 타고 이어진다. 몸 속의 세포는 생성과 소멸을 끊임없이 반복한다지만 159센티미터 47킬로그램의 거푸집 같은 외형으로 고정된 나는 결국 하나이다. 비중을 반영한 내 안의 각 역할들이 크고 작은 퍼즐로 쪼개지고 맞물려 채우고 있다.
명절을 앞두고 매년 그렇듯-15년 째일 거다- “과장님, 잘 지내셨죠?”로 시작하는 추석 전 안부 인사를 보낸다. 스물다섯 시작한 직장생활, 첫 사수와 나는 대리님과 사원의 관계로 만났다. 애증의 그 곳을 미련 없이 떠난 후에도 내 사수의 승진 소식에 “커짱(과장)~ 커짱~” 호들갑을 떨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제는 지역, 규모, 업종도 완전히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월급쟁이라는 것 뿐이다. “커짱님(실제론 부장), 올해는 근속 기념 순금 명함이라도 받으셔야겠어요.” 여전히 서로에게 대리님, 진아씨가 가장 익숙하고 마음에 드는 호칭이라며 야근과 외근에 지쳐 택시에서 나란히 졸던 추억을 다시 꺼낸다. 회의실에서 노트북을 맞대고 일했던 밤들, 대리님이 있어 2년을 버텼다는 말은 눈물이 날 거 같아 올 해도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만 17년 직장 생활처럼, 앞으로도 높은 확률로 별일 없이 회사에서 커리어를 유지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퇴사를 맞이할 것이다. 그때의 최종 직함, 김차장 또는 김부장이 남은 생애 동안 가장 많이 불릴 나의 호칭이 된다. 딱딱하고 거친 갑옷처럼 특징도 매력도 드러나지 않는, 직함이 전부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였구나. 작가로 불릴 수도 있을 거란 설렘과 기대감에 자꾸만 욕심이 생기는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표현을 놓칠까 봐 휴대폰 메모에 서둘러 입력한다. 매끄럽지도 친절하지도 않지만 순간 소중했던 문장들이 늘어난다. 주로 출퇴근길이지만 어쩔 땐 회의나 업무시간에도 써야할 장면이 떠오르면 눈앞에 이면지에라도 적어 다급히 생각을 붙잡아 놓는다.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작가도 아니면서,,, 민망함에 헛웃음이 난다. 그러다 한 주 한 페이지씩 나의 욕망을 탁본하듯 단단하고 선명히 찍어내는 노력을 예뻐해 주기로 한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알 수 없는 흥이 오른 모녀는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댄스 타임을 시작한다. 나와 26살 차이 난다는 멤버가 속한 그룹의 신곡 뮤직비디오를 틀고 비장하게 첫 비트를 기다린다. 마음먹으면 6-7곡 30분쯤은 쉼 없이 우리만의 댄스 공연이 가능하다. 안무를 따라 하는 건지 운동을 하는 건지, 회생불능 몸치인 나의 모습은 남편과 아이만 볼 수 있다. 열렬한 호응은 없지만 외면하지 않고 사운드바 ON을 켜고 조명 모드를 슬쩍 조절해 주는 남편이 유일한 관객이다. 숨이 차도록 과격한 몸동작을 하고 나니 회사에서 내내 꾹꾹 눌렀던 스트레스가 풀린 듯 기분이 좋다. 긴장이 빠져나간 곳에 가볍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온다. 버럭쟁이 엄마를 작게 하고 눈물생산공장장 진아를 편히 쉬게 달랜다. 겁나 빠른 진아씨를 다독이고, 퇴근 후 노트북을 켜고 한 단락의 글을 고심하는 작가지망생을 응원한다. 나만 아는 욕망추적기를 켜 놓고 불안도 높은 내 마음을 돌본다.
September 03,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