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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꿈꾸고 싶은 나이

꿈꾸고 싶은 나이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 누군가는 동물, 식물에도 과일-꽃으로 세분화된 카테고리별 갖고 있는 태몽도 임신 중 한 번을 꾸지 않았다. 만 41년, 일만 오천 번쯤 보낸 매일의 밤이지만 꿈을 꿨던 날은 특별하다. “꿈이 생생해서 잔 것 같지도 않아. 꿈 때문에 더 피곤하기만 하지.” 별걸 다 바란다는 듯 무심히 말하는 상대에게 꿈꾸는 비법이라도 묻고 싶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 세계의 발현이라 했다. 현실에서 꺼내지 못한 무의식 속 날것의 욕망 실현을 나만 놓치고 있는 거 같아 안타깝다. 스스로 입은 갑옷 같은 억압을 벗어버린 꿈에서의 모습이 진짜 나일 지 모른다. 엄숙함을 내던진 자아(ego)를 오늘 밤에는 만날 거란 기대감이 턱까지 끌어올린 이불만큼 나를 휘감는다.


꿈꾸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정작 기억하는 꿈은 즐거운 장면이 아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표시된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운전석 핸들 앞에 앉아 있다. 19년째 장롱면허이기에 꿈일 수밖에 없다. 산마다 꽂혀 있는 송전탑은 고압 전선을 어깨에 걸치고 불안하게 이어진다. 순간, 느슨하지만 적당한 탄성을 유지한 전선이 휘청이다 끊어지며 송전탑 하나가 기울어진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철탑 바로 아래를 내가 운전하는 차가 달리고 있다.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를 정신없이 보며 질주하다 겨우 ‘킥(kick)!’, 눈을 뜨면 익숙한 침실 암막 커튼이 보인다. 지금 딸 나이 때쯤, 꿈에서 나는 강한 압박에 눌려 몸을 일으킬 수 없다. “엄마, 옷장이 내 쪽으로 넘어와. 자꾸 넘어와요.” 꿈속 옷장의 테두리는 밝은 빛의 반짝거림이 아닌 불안한 기운으로 깜빡이며 누워있는 나를 덮칠 듯 휘청댄다. 잊히지 않는 어릴 적 꿈과 잠꼬대는 무더위에 한 번씩 쓰러지는 허약한 몸을 향한 확실한 경고였다. ‘넌 작고 예민한 사람이야.’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를 때, 내 불만과 불안은 꿈의 주재료가 되었다. 


감정 표현을 누르고 숨기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라는 가치 판단을 버리지 못한다. 무의식에서조차 욕구를 맘껏 드러내지 못해서일까, 나의 꿈은 현실과 가깝게 가공되지 못한 채 재난 영화에서나 볼 만한 극적인 장면들과 더 닮아 있다. 꿈인지, 생신지 착각하며 짜릿한 경험을 선택할 기회는 오지 않는다. 꿈꾸기가 어려운 나는 이불 안에서 오늘 밤 꾸었으면 하는 장면을 설계한다. 뉴스를 진행하던 중 속보가 뜬 긴급 상황, 프롬프터에서 시선을 떼고 순간 떠올린 앵커 멘트로 침착히 속보를 전하며 오늘도 완벽히 뉴스를 마친다. 예정에 없던 급한 업무 요청으로 유독 신경이 곤두섰던 하루를 보낸 날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정 변경에도 여전히 심장이 두근대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미간이 좁혀진다. 완벽한 모습의 뉴스 앵커를 꿈꾸지만 현실의 김 차장은 조금의 불규칙과 변동에도 불안해하며 퇴근을 늦춘다. 꿈(dream)은 그래서 두 가지 뜻을 갖는다. 이상, 희망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잠든 상태에서도 바라는 이상을 이루고 싶은 열망이 있다.


가을 찬바람과 시작된 목을 긁는 아이의 음음! 큼! 소리에 신경이 예민해진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살피며 거실에서 영화 <인셉션>을 본다. 집중이 되지 않지만 이미 네댓 번은 넘게 본 영화라 괜찮다. 물 한 컵을 가져다주며 페퍼민트 오일을 베개에 떨어뜨리고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목에 뿌려주고 나서야 아이는 잠이 들었다. 2단계 꿈의 호텔 장면을 보던 중, 히힛 꺄르르 웃는 아이의 잠꼬대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나에겐 대부분 불안을 확인하는 꿈 세계에서 넌 여전히 즐겁고 기뻐하는 것에 안도한다. 내일 일어나면 너에게 무슨 꿈이었는지 꼭 물어야지. 행복한 꿈을 꾸는 비결과 함께. 아이는 마치 자신이 정말 대단한 걸 해낸 듯, 자신만만하게 나에게 있는 비법 없는 비법을 전수해 줄 것이다. 아직 한창 꿈꾸고 싶은 나이라 주장하지만 얼마 전 친구의 뜻밖이지만 솔직했을 권유가 떠오른다. “진아야, 너도 보톡스 한 번 맞아라.” 테이블 위 거울을 끌어당겨 이마와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본다. 친구가 시술 받았다던 성형외과 이름이 뭐였더라, ‘닥터**’ 이었나. 흘려들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잠시 잊고 병원명을 물어보려 휴대폰을 집어 든다. 


Octobrt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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