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대화방에 부고가 뜬다. 즉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 적힌다. 이어서 같은 문장이 줄줄이 올라온다. 그렇게 새겨진 도장이라도 찍은 것처럼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다른 말은 하나도 없고 저 문장만 스무 개 찍혔다.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같은 말만 하나 싶었다. 상황에 맞는 최고의 예를 갖춘 말이라 여겼을지 모르나 그 말이 상주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똑같은 말에 스무 번씩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누가 했든 그 문장이 한 번 더 찍히고 덜 찍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주라도 읽으나 마나 한 말 말고 다른 말도 좀 듣고 싶다. 남과 똑같은 말을 하는 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나는 동어반복을 몹시 싫어한다. 생일을 축하할 때도 남이 한 말을 똑같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조문할 때도 ‘얼마나 놀라셨어요’나 ‘얼마나 애통하실지요’로 시작해 ‘아버님이 길이 안식하시길 빕니다’로 마무리해도 된다. 상주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한없이 따라 하는 것, 표절은 아니라 해도 성의 없는 일이다.
같은 대화방에서 한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앞으로 모임에 못 나가겠다고 고한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한참 동안 방은 침묵에 쌓여있다. 거기에는 서운한 마음과 얄미운 마음이 섞여 있음을 안다. 그래도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떻게 말해야 남아있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떠나는 사람도 덜 미안하게 여기게 할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짰다. 겨우 할 말을 생각해 정성 들여 쓰고 올린다. 그제야 사람들의 말문이 터지는데 나오는 말은 다 내가 한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 아무개가 하신 말씀처럼, 같은 말도 없다. 그냥 내가 쓴 단어로 자기 생각처럼 말한다. 이럴 때 나는 내 단어를, 내 생각을 도둑맞은 것 같다. 이건 명백히 표절이다. 남이 힘들여 생각한 말을 들고 가서 쓰는 게 표절이 아니면 무엇인가. 대놓고 하는 표절인데 표절인 줄도 모른다. SNS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본다. 남의 말이나 글이 아무리 마음에 딱 맞아도 허락 없이 가져다 쓰면 절도나 다름없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 표절도 있다. 신경숙 작가 같은 경우다. 노래 한두 마디를 표절해도 알아내기 어려운데 수십만 자나 되는 소설에서 어떻게 표절인 줄 알아냈을까?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눈 밝은 독자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얼굴이 다르게 생긴 것처럼 생각도 다 다르지만 한편, 같은 원소로 이루어져서인지 비슷하기도 하다. 나만의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놀라고 실망하기도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으니 내가 한 생각이 새롭지 않음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떤 상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가장 뻔한 생각이라고 했다. 우리는 날마다 뻔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비슷한 결과물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는가. 밀실에서 혼자 작업했는데 누군가의 작품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내 작품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려면 조금이라도 남의 건 가져다 쓰지 말아야 한다. 떳떳해야 나와 내 작품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잘하고 싶은 일을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을 시기한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을 시기하지 김연아 선수나 손흥민 선수를 시기하지 않는다. 따라 할 수 없는 일에는 시기도 할 수 없다. 그저 감탄할 뿐.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 치며 한 점의 불순물도 없이 기쁘다. 그들이 잘할수록 더 기쁘다.
그러나 잘하고 싶어서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을 눈 깜빡이듯 쉽게 해버리는 사람을 보면 맥이 풀린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살의도 이해가 간다. 살리에리는 왜 경망스럽고 방탕한 모차르트에게는 천재성을 주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신에게는 그걸 알아보는 재능만 주었느냐고 신을 원망한다. 세상에는 천재와 범재가 섞여 있는 법이니 어쩔 수 없다. 좌절감에 빠져 있다 보면 천재의 작품을 훔치고 싶은 마음까지 들지만 그러면 죄가 된다. 범재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는 일은 넓은 의미에서 다 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도 선조들이 써온 말을 표절한 게 아닌가. 예법도 표절하여 사람의 출생은 크게 기뻐하고 죽음에는 엄숙하고 슬픈 얼굴을 짓는다. 결혼에는 축하를, 이혼에는 위로를 한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행동은 오랫동안 선인이 살아온 방식을 표절한 것이다.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성과도 마음껏 이용한다. 작게는 치약, 칫솔, 종이부터 크게는 자동차, 냉장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걸 만든 사람이 얼마나 고뇌하고 피땀을 쏟았을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내 것인 듯 그냥 쓴다.
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기저귀도 안 뗀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누구나 학교를 가니 학교도 보낸다. 남이 가는 학원을 가고 남이 가는 일터에 간다.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려 하고 남들이 가진 물건들을 사들인다. 남처럼 결혼도 한다. 아이를 낳으면 도돌이표. 다시 남처럼 키우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서로 남의 삶을 표절하여 옆집이나 뒷집이나 비슷하게 살아간다.
원한다면 사는 방식의 표절은 문제 될 게 없다. 헨리 D. 소로처럼 호숫가에 집을 짓고 혼자 힘으로 살거나 타샤 튜더처럼 온종일 정원에서 꽃과 식물을 가꾸며 산다고 해서 남의 사는 방식을 훔쳤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로가 쓴 <월든>의 한 대목을 그럴듯하게 가공하여 자기 생각인 양 발표하면 안 된다. 월든 호수는 공공의 것이지만 <월든>이라는 책은 오직 소로의 것이니까. 사전에 있는 모든 말을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도라지꽃으로 바꾸면 안 되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표절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작가는 카디건을 걸치고 책상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밤 깊도록 글을 쓴다. 쓰다가 막히면 안경을 벗고 옆에 있던 커피잔을 든다.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감고 의자 등받이에 쭉 등을 기댄다. 바로 그 모습이다. 작가가 되어 그렇게 살고 싶었다. 가끔 글을 쓸 때 비슷한 모습이 나오긴 해도 모습뿐, 작가가 아니므로 표절은 실패다. 자신의 책을 받아들고 낙엽이 구르는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사색하는 작가의 모습은 상상 속에만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오후에는 여느 사람처럼 생활했던 박완서 작가, 설날과 아버지 돌아가신 날을 빼고는 쓰지 않은 날이 없다는 조정래 작가, 그들을 표절하고 싶다. 그들처럼 일상 속에서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그들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애써서 번 돈을 좋은 일에 쓰고 자신은 극히 절약하며 사는 사람, 사치품 가방을 사는 대신 아픈 사람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사람, 백화점 할인 판매 기간에 한정품을 사려고 줄 서는 대신 도시락 봉사를 하러 가는 사람도 표절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오드리 헵번의 우아함과 선한 행보를 완벽하게 표절하고 싶다. 비록 마더 테레사의 삶을 다 표절하지 못한다 해도 마음을 내어 한 방울의 사랑이라도 세상에 더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