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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각 이불

브런치 작가는 작가인가

by 가을산

브런치 작가가 된 걸 축하한다는 메일 첫 줄의 ‘작가님’이란 단어에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작가가 아니어서다. 책의 저자라면 당연히 작가지만 펴낸 책도 없이 글 쓸 지면을 하나 분양받았다고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메일에서 브런치 작가란 ‘예비 작가’나 ‘견습 작가’의 줄임말로 ‘미래의 작가’란 뜻일 터였다. 브런치 스토리를 ‘예비 작가의 등용문’이라 한다면 적절한 말이라 하겠다. 도자기를 잘 만들기 위해 유명한 도공 밑에서 오랜 기간 수련하는 견습생처럼 작가가 되려는 사람도 견습 기간이 필요하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다. 첫 글을 올리자마자 핸드폰에서 라이킷 알림 소리가 연속으로 울려서 놀랐다. 가끔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몇 날 며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이 잠잠한데 올리는 즉시 보고 여러 사람이 좋다고까지 해주니 무척 기뻤다.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보는 곳에 왔구나 싶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브런치 작가는 무려 7만 명이라 한다. 언제나 몇 사람은 브런치에 접속해 있을 테다. 새 글은 올린 시점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 같다. 보인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니고 읽고 싶어야 읽는다. 그러다 다른 글이 치고 들어오면 내 글은 점점 덮이고 묻힌다. 쏟아지는 글 가운데 내 글이 보이는 시간은 기껏 한두 시간, 길어야 서너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 후로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요일별 연재’라는 제목 아래 정리되어 뜨는 연재 글과 달리 소속 없이 띄운 글은 낙동강 오리 알처럼 떠돌다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연재 아닌 글은 어떻게 노출되는지 아직도 모른다.


연재하는 글과 그냥 올린 글의 조회 수는 차이가 많다. 스스로 연재 글보다 읽을 만하다 여겨 좀 봐주었으면 하는 글도 조회수는 미미했다. 이 글도 연재가 아니니 얼마나 봐줄지.

그렇다고 모든 글을 정해진 때에 올리기는 너무 부담스럽다. 1주일에 한 번 연재해도 글을 올리고 난 화요일 저녁이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으니. 연재하지 않는 글까지 포함해 되도록 많은 사람이 글을 보게 하자면 구독자가 많아야 하는 것 같다.


블로그에 글을 쓴 지 몇 년이 되었어도 왕래하는 이웃이 없다. 사회성 부족은 온라인에서도 나타난다. 브런치에 와서도 그랬다. 글쓰기만 대수로 여기고 글을 올리고 나면 손을 털었다. 진짜 작가이기나 한 듯이. 유서 깊은 작가의 태도가 그렇지 않은가. 오랫동안 고뇌하며 글을 쓰고 원고를 넘기면 그들은 연락을 끊고 떠나버린다. 책이 발간되어도 책의 홍보나 독자의 반응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책이 잘 팔리면 좋고 안 팔리면 독자가 수준이 낮아 이해를 못 한다고 치부한다. 책이 덜 팔려도 권위 있는 문학상도 받은 훌륭한 작가니 원고 청탁과 출판 계약은 마르지 않는다.


나는 기성 작가처럼 글만 썼다. 글만 잘 써놓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봐줄 줄 알았다. 그런 부러운 사람도 있기는 했다. 자신이 구독하는 사람은 아주 적거나 심지어 한 명도 없는데 천 단위의 구독자를 보유한 사람이. 그 사람은 이미 작가거나 작가에 버금갈 만큼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그 어느 쪽도 아니면서 나는 글만 발행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내가 구독하는 사람도, 나를 구독하는 사람도 없었다. 라이킷 수도 얼마 되지 않지만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았다. 내 글이 그리도 형편없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재미도, 감동도 없고 공감도 되지 않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글인가 싶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류귀복 님의 ‘돈 버는 브런치 글쓰기’를 읽고 알았다. 글 실력이 평범 이하일 내가, 내 글을 읽게 하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방문해 새로 입주했다며 떡이라도 돌려야 하는 줄 나는 몰랐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황금률은 브런치 스토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기 있는 작가가 새 책을 냈다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린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당연히 재밌겠거니, 훌륭하려니 한다. 지난 겨울, 노벨상 받은 한강 작가의 책이 한참 동안 품귀 현상을 빚었던 것처럼. 예전에 인기 가수의 음반도 그랬다.

브런치에서도 구독자가 많은 인기 작가의 글에는 짧은 시간 안에 무수히 많은 하트와 댓글이 달린다. 그걸 보면 글이 많이 읽히는 데는 글을 잘 쓰는 것보다 구독자를 많이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한 일 같다. 나도 구독자가 많으면 많이 봐주려나?

그래서 노력해 봤다. 날 잡아 떡 쟁반을 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브런치 마을은 아주 넓었다. 사잇길이 얼마나 많은지. 사회성이 부족한 나에게는 내 떡 내밀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쓴 글을 잘못 읽지 않도록 글마다 시간을 들여 정독했다. 나는 진정 이 글을 좋아하는가, 내가 쓴 댓글이 오해할 만하지는 않은가 하여 하트 하나 누르기, 댓글 하나 달기도 조심스러웠다.

구독 신청할 때는 정말 이 사람의 글을 계속 잘 읽어줄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하고 했다. SNS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나는 구독하면 그 사람이 올리는 글을 다 읽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럴 마음도 없이 구독한다면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구독이란 단추 하나를 누르는 데도 극도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내 글을 올린 뒤 며칠씩 그렇게 하고 났더니 머리, 어깨, 무릎, 허리가 다 아프고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구독자는 좀 늘었지만 큰 성과를 얻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정도다. 아무래도 그 방면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상대가 구독하든 않든, 앞으로도 읽고 싶은 글의 작가를 구독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구독한 작가가 나는 안 해, 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친구라고 여겨 ‘새콤달콤’ 한 개를 내밀었는데 받지도 않고 돌아서 가버리는 걸 본 기분이랄까? 때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는데 차갑게 외면당한 느낌도 들었다.

반대로 내 글을 읽어 보지도 않고 구독 신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글을 읽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내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구독자 수가 중요한 것 같은 사람. 그럴 때 그 사람의 글을 읽어 보고 도저히 계속 읽어줄 자신이 없으면 나도 과자를 받지 않고 외면하는 아이가 되기도 했다.

초기의 나는 고지식했기에 의리를 지키려다 몸도 마음도 괴로웠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사람을 구독하여 쓴 글을 다 읽었지만 그는 구독만 하고 그렇지 않아 서운해하기도 했다. 좋은 글이 얼마나 많은데 변변찮은 내 글을 안 읽은 게 무슨 죄라고.

구독자가 천 명이 넘는 어떤 분이 구독을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며 지나친 부담을 내려놓고 편하게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딸아이는, 유튜브의 백만 구독자가 매번 다 보느냐며 그냥 관심 좀 있다는 뜻으로, ‘즐겨찾기’로 생각하라고 했다. 즐겨찾기, 좋다. 무슨 마트를 ‘즐겨찾기’ 했다고 날마다 가야 되는 건 아니지.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구독을 하거나 받는 것에도 좀 너그러워졌다.

맞구독을 하지 않는 사정도 이해가 되었다. 구독자 수가 두 자리 이하라면 한 명 한 명 느는 게 반갑고 기쁘고 고맙지만, 수가 많다면 한 명 더 늘었다고 그렇게 감동되지는 않을 것 같다. 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보고 좀 늘었네, 할지도 모른다. 다다익선이라고 고마워하며 받아주는 사람도 있지만, 있는 구독자의 글도 다 못 읽는데 한 명 더 추가하기 귀찮다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날 구독했으면 됐어, 척 보니 글도 시원찮네, 했는지도 모른다. 아, 도로 글이다. 온몸이 아프도록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근본 문제는 글이었다. 결국, 내 글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글을 읽지 않고 구독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프지만 그게 진실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지금, 내 글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음은 취향의 문제라 여기기로 했다. 매번 실연의 상처로 신음할 수는 없다. 나는 소피 마르소인데 마릴린 먼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나는 말괄량이 삐삐인데 그레이스 켈리를 좋아한다면 어쩌겠는가. 잡고 늘어졌던 옷자락을 놓아야지. 나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한다.

구독자가 고정 독자나 열혈 독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내 글에 라이킷을 누른 구독자는 전체 라이킷 수의 1/4에서 1/5에 불과했다. 구독하지 않지만 매번 글을 읽고 라이킷해주는 분들도 있다. 구독자가 적고 라이킷 수도 많지 않아 잘 알 수 있다.

구독자가 많을수록 으쓱하겠지만 그것이 그만큼의 조회 수와 공감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천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사람의 글에 천 개의 라이킷이 달린 건 보지 못했다. 당원이 몇 명인가보다 당에 좋은 정책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앞으로는 작정하고 떡 쟁반을 들고 돌아다니지는 않으려 한다. 이사한 지도 좀 되었으니 그만할 때도 되었다. 구독자 수에 신경 쓰기보다 구독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는 글을 더 자주 쓰고 좋은 글을 쓸 동력을 얻기 위해서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마을을 거닐다 우연히 고샅길에서 이웃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는 이야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한동네 사람으로 어울려 살겠다.

유명한 도예가의 작품은 만들어지자마자 고가에 팔리지만 견습 도공이 만든 도자기는 그렇지 않다. 당연하다. 작은 수술이라도 정식 의사에게 맡기지 실습하는 예비 의사에게 맡기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견습생은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만든다. 어쩌다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도자기에 눈길 한 번 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견습생이 할 일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열심히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드는 일이다. 이 견습생과 내가 뭐가 다른가. 나는 견습 작가인데.

자그마치 7만분의 1의 확률인데 내가 만든 도자기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데 감사할 일이다. 하트까지 눌러주면 감읍할 일이다. 요즘 올리는 글에 구독자 수보다 많은 수의 하트가 달리니 더욱 감사하고 신기하다. 생각해 보니 구독자가 0일 때도 하트가 열 몇 개는 되었으니 그때도 그랬네. 구독자가 적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견습 도공과 똑같다. 끊임없이 글을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드는 일이다.

최근 화제가 된 한 가수는 10년 이상 무명의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높이 떴다. 10년은 얼마나 긴 시간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되리라는 두려움과 좌절, 절망 속에서 애쓰는 10년은. 무명의 시기가 길면 길수록 하늘 높이 떴을 때의 기쁨은 더 크리라. 나는 지금 무명의 시기에 있으니 사람들이 나를 외면함은 당연하다. 저 가수처럼 오래 기다리면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고흐처럼 죽은 뒤에야 인정받게 되는 예술가도 있다. 문득 발굴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천재 예술가와 작품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명 가수가 지하실에서 작곡하고 묻힌 노래가 지금 유명한 가수가 TV에서 부르는 노래보다 훨씬 높은 예술성을 갖췄는지 누가 알랴. 끝없이 애쓰다 실패만 하자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된 가수 지망생이 과거에 만든 노래가 시대를 앞서는 걸작일지 어찌 알겠는가.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뛰어나다고 여겼을까? 어느 정도는 그랬던 것 같다. 그림이 한 점도 안 팔려도 고흐는 자신을 화가라 여겼을까? 그랬다고 본다.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수도 없이 좌절하고 절망했어도 고흐는 최선을 다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언젠가는 알아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었다. 사후에 이렇게 많은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견습 작가로서 고흐를 본받아야 할 것 같다. 현재 읽어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꾸준히 쓰기를. 성심을 다해 읽을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 꺼진 불도 다시 보듯 파묻힌 글을 꺼내보는 사람도, 읽고 마음에 들어 맨 위에 올려놓고 가는 사람도 생길지 모른다. 언젠가는 내 노래를 듣겠다는 사람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고흐처럼 매일 열심히 글을 쓰는 브런치 작가가 본인을 작가라 여기는 건 잘못된 게 아닌 것 같다. 고흐처럼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해야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신춘문예에 등단하고도 등단 작품이 마지막 작품인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글 쓸 허가증을 받았다고 작가는 아니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다. 쓰는 사람이 작가다.

어떤 글쓰기 책에서 본 ‘작가는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브런치에서 날마다 열정 엔진을 돌려 글을 쓰는 사람, 작가라 부르기에 손색없다.

브런치 작가로 받아줘서나 댓글에서 작가라 불러줘서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글을 쓴 나도 작가인 것 같다. 물론 앞에 ‘견습’이 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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