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초하룻날이 저문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와 부모님께 세배하고 차례를 지낸 뒤 친척 집까지 다녀온 바쁜 하루였다. 떡국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드디어 그 시간이 온다. 일 년 내내 기다리던 윷놀이하는 시간. 아버지께서
“윷은 어디 있노? 갖고 오너라.”
하시면 나는 득달같이 달려가 윷을 꺼내오고 대자리를 가져와 방 가운데 깔고 옆에다 말판을 펼쳐 놓는다. 말로 쓸 검고 흰 바둑돌도 네 개씩 말판 위에 올려놓는다. 할아버지가 박달나무로 손수 깎으셨다는 진한 갈색 윷은 매끈매끈했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대자리 바깥으로 빙 둘러앉은 사람 수는 대략 여덟이나 아홉이었다. 참가 인원은 조금씩 달랐지만 설날 저녁에 온 식구가 모여 윷놀이하는 것은 우리 집의 오랜 전통이었다. 컴퓨터도 휴대 전화도 없고 집 안에서 마땅히 놀 거리도 없던 시절에 유일하게 부모와 함께 놀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두 편으로 나눈 후 아버지는 양 편에서 한 사람씩 윷가락 두 개로 먼저 놀아보라고 했다. 어느 편이 먼저 시작할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윷은 둘 다 엎어지거나 둘 다 젖혀지거나 하나만 젖혀지므로 순서는 금방 정해졌다. 둘러앉은 차례대로 양 편이 번갈아 윷을 노니 좌우에 앉은 사람은 남의 편이었다. 같은 편끼리 붙어 있지 않아 조금 풀이 죽고 적지에 홀로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 차례가 되면 한 사람 건너에 있는 우리 편들이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도’를 센 발음으로 ‘또’라고 하고 출발부터 ‘또’만 자꾸 나오면 또닥또닥 간다고 했다. 어느 편이랄 것 없이 세월아 네월아, 또닥거리고 있으면 한 편에서 이리 느리게 갈 거면 한 번에 가자, 하며 말 두 개를 포개어 버린다. 그러면 잠시 후 다른 편에서는 세 개를 포갠다. 이 석 동짜리가 순조롭게 가는 게 배 아프고 마음이 급해지면 맞선 편은 아예 초반부터 네 개를 얹어 넉 동을 만들어 버린다. 어떻게 가든 말 네 개가 상대편보다 빨리만 가면 되니 모험을 해보는 거다.
말은 주로 아버지가 쓰셨다. 아버지는 말판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계실 때에도 전세를 훤히 꿰고 계셨다. 아버지는 ‘말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그렇게 쓰면 안 된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말 쓰는 법’이 무슨 법률 조항처럼 엄정하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섣불리 말을 움직이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큰 오빠의 의견도 아버지는 거의 듣지 않으셨으니까.
아버지의 말 쓰는 법은 자주 아버지 편의 승리를 가져왔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남의 말은 듣지 않고 당신의 법만 고집하다 폭삭 망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지침대로 했다가 고지를 바로 앞에 두고 석 동이나 넉 동짜리가 쫓아오던 말에게 콱, 잡혀버리면 식구의 절반은 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땅이 꺼질 듯했다. 반면 아버지의 어허허허, 하는 웃음소리는 너무 크고 높아서 천장을 뚫을 것 같았다. 이기는 줄 알고 한껏 부풀어 있었기에 막판에 따라 잡힌 게 그렇게 억울하고 분할 수 없는데 아버지는 뭐가 재미있어서 그리 큰 소리로 웃는단 말인가. 아버지가 정말로 재미있어서 그러는 것 같아 나는 더 약이 올랐다. 말 참 잘 썼소, 하는 어머니의 비아냥거림에 아버지는 더 크게 웃었다. 이게 재미지, 이 맛에 윷을 노는 거지, 라는 뜻이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체로 같은 편이 아니었다. 다른 편인 어머니가 쓴 말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말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훈수를 두면 어머니는 아버지 말에 따를 때도 있고, 우리 말은 우리 마음대로 쓸 테니 놔두소, 라 할 때도 있었다. 어머니 마음대로 써서 어머니 편이 이길 때도 있었으니 아버지의 말 쓰는 법이 반드시 이기는 법은 아닌 모양이었다. 공은 둥글기 때문에 어디로 굴러갈지 예측할 수 없다던 축구 감독의 말처럼 윷가락도 때구루루 굴러서 설 때까지는 끝을 알 수 없다는 게 아버지의 변명일까?
결전의 순간이 오면 승패를 가름할 전사를 내보내며 우리는 열렬한 응원을 했다. 두 ‘모’, ‘도’만 나오면 완승이다. 우리는 집게손가락을 바닥에 대고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모르-을! 모르-을!’ 하며 기를 모아 주었다. 정말로 모가 나오면 와아, 하고 환성을 지르며 ‘하나! 하나 더, 모르-을! 모르-을!’ 하며 또 동그라미를 그렸고, ‘또’가 나오면 ‘또’부터 먼저 했네, 하며 주자의 민망함을 달래주었다.
내가 잠시 조용히 있으면 한 손에 윷가락 네 개를 나란히 하여 끝을 바닥에 대고 세운 준비 자세로 아버지가 너는 왜 가만히 있느냐고 했다. 그러면 나도 얼른 언니, 오빠를 따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모르-을! 모르-을!’ 하고 외쳐야 했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뒤 아버지가 어여차, 하고 윷을 놀면 세 가락은 중간쯤 올라갔다가 아래로 먼저 떨어지고 한 가락은 위로 높이 올라갔다가 나중에 떨어졌다. 높이 올라갔던 윷가락이 뒤늦게 떨어지면서 먼저 안착한 윷가락들을 치거나 건드려 아버지가 옳지, 뭣이냐, 하고 소리치는 동안에 ‘또’가 ‘모’가 되거나 ‘모’가 ‘또’가 되었을 때 양 진영에 드리워지는 희비의 쌍곡선은 어찌 그리 뚜렷하던지. 그럴 때 다시 터지는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어찌 그리 폭포수처럼 장쾌하던지.
잘하는 걸 칭찬하기보다 늘 잘못을 지적하고 호통만 치던 아버지가 일 년에 한 번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때가 설날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것도 아주 호탕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윷놀이할 때에야 알았다. 해마다 그때만 알고 잊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어 이런저런 근심으로 늘 어깨가 무겁고 등이 휘었을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일 년에 한 번 윷을 놀 때만이 호통보다 큰 소리로 웃으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었던가.
약이 오를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웃는 게 정말 좋았다. 엄격하고 무섭기만 하던 왕이 큰 소리로 웃으니 그의 백성인 나도 덩달아 마음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가슴에 한가득 빛이 들어찬 것 같았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화롭다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아버지가 웃으시니 나의 세상도 편안하였다.
윷놀이할 때 내가 아버지께 배우고 싶었던 것은 말 쓰는 법이 아니라 마술처럼 보이는 윷 던지는 법이었다. 한 가락을 위로 높이 올려 세 가락이 먼저 떨어진 다음에 떨어지도록 해서 판세를 바꾸기도 하는 기술이 무척 신기해 보였다. 그러나 윷가락 네 개를 나란히 쥐기도 버거운 작은 한 손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어른 된 지금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보여드릴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고 설마다 윷판도 벌어지지 않는다. 매끄럽고 감촉 좋던 박달나무 윷도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가버린 사람과 물건들은 어디에 다 모여 있을까?
두어 해 전 설날, 큰오빠네 집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나처럼 어릴 때 추억을 잊지 못하는 동생이 간단한 윷과 말판을 가지고 와서 오랜만에 다 같이 윷을 놀았다. 내가 아버지의 마술 아닌 마술을 구사할 때 연한 겨자색 마고자를 입고 파안대소하시던 아버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색동저고리에 붉은 한복 치마를 입고 들떠 있던 나와 동생들, 새파란 오빠와 앳된 언니도 보였다. 그 옛날처럼 함께 둘러앉아 윷을 노는 우리를 보고 아버지가 잘 노는구나, 하셨을까?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서 마지막 윷이 친 윷가락이 젖혀진 몸을 바로 하는, ‘또’가 ‘모’가 되는 마법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은 아버지가 다 쓰셔도 좋으니 돌아오는 설에는 같이 윷을 놀며 온 식구 목소리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높은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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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팬데믹으로 꼭꼭 문 닫고 집에만 있던 겨울, 가족을 소재로 한 작은 공모전에 응모해 1등상을 받은 글입니다. 조금 민망하지만 지금까지 올린 글도 다 민망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며 올린 거라 한 번 더 무릅써 봅니다^^ 글을 내보이는 일은 항상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럼에도 발표함은 제가 뻔뻔해서인 것 같습니다. 이 뻔뻔함을 버려야 할 지 놔둬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