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한 세부의 첫날

by 시더루츠

공항에서 동생과 헤어진 후 짐 검사를 통과하자마자 바로 탑승구가 보였다. 시간이 조금 남았다. 면세점을 잠깐 둘러보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설날 직후라 금액도 싸고 자리도 여유로울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기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가족 단위 승객이 많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탄 할머니, 대가족이 함께 이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옆자리가 비어 있기를 바랐지만 덩치 좋은 아저씨 둘이 자리를 채웠다. 그나마 나는 복도 쪽이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밤비행기는 출발했다. 새벽 1시쯤 도착한 막탄 공항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다 죽어가는 듯한 작은 환전소뿐이었다. 심카드를 사려고 둘러봤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28도의 열대야가 몸을 덮쳤다. 급하게 긴 옷을 벗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구석에 아주 작은 심카드 판매대가 있었다.


이곳은 선택권이 없는 곳이었다. 1일, 3일, 7일짜리는 없고 오직 두 가지. 한 달 79기가, 한 달 150기가. 나는 79기가, 1000페소짜리를 골랐다. 옆에 있던 외국인 아저씨가 투덜거리듯 말을 걸었다. “비싼 거 아니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웃으며 “굿럭”을 외치고 사라졌다. 나도 따라 웃었다.


택시 기사들의 호객을 피해 그랩을 불렀다. 숙소까지는 30분. 차창 밖은 황량했다. 새벽이라 대부분의 가게는 닫혀 있었고, 어둠 속 풍경은 낙후된 느낌을 더했다. 묘하게 두려움이 올라왔다. 거친 운전에 살짝 긴장도 했다. ‘가장 안전하다’는 시티 주변으로 들어서자 환한 빌딩들이 보였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 빈민촌 같은 풍경 옆에 덩그러니 내 콘도가 나타났다. 마음이 아차 싶었다.


콘도 가드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 5페소를 요구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냥 건넸다. 숙소는 오래된 필리핀 아파트 같았다.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걸까. 삭막했고 포근하지 않았다.


이 숙소를 예약한 데도 사연이 있다. 원래는 호텔을 보았다. 생각보다 비쌌고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로 눈을 돌렸지만 한 달에 100만 원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숙소 비용은 최대한 아끼고 싶었다. 가장 싼 곳을 찾았다. 세 군데 정도 추려 장기 숙박 할인 가능하냐고 메시지를 보냈고, 지금의 숙소가 가장 많이 깎아주었다.


가격만큼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씻고 누워 에어컨을 자세히 보니 창문형이었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방식이었다. 깨어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불을 끄고 누워있자 소리가 달라졌다. 커졌다가 꺼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거칠고 컸고 거슬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어떻게든 참고 자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거기에 아침에만 운다는 닭은 이상하게도 매시간 울어댔다. 거기에 차와 오토바이 소리도 계속 이어졌다.


마음속 불만이 서서히 차올랐다. 왜 세부에 왔을까. 한국에 가고 싶다. 여기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을까. 몸 상태도 안 좋은데 더 나빠지면 어쩌지. 생각들이 밀려왔다. 무시하고 자려고 했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어컨을 끄고 잠들었다. 대신 더위와 끈적함에 스무 번쯤 깼다.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