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숙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근처에 성당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들어가 기도를 했다. 건강하게, 무사히, 잘 머물다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점심 무렵에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던 아얄라몰로 향했다.
거리를 걷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혹시 모를 치안 문제에 대한 경계심이 나를 꽉 잡고 있었다. 사람들, 오토바이, 주변 시선들.
번화가였지만 도로포장은 엉망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질 것 같았다. 발목에 힘을 주고 걸었다.
아얄라 몰에서 처음 먹은 음식은 돈가스 카레였다. 필리핀 음식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크지 않았다. 한국 사람 입맛에 잘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맛은 평범했고, 그저 “그렇구나” 하며 넘겼다.
카페에 들러 잠시 쉬었다. 이후 바디용품을 둘러봤다. 필요한 것들은 현지에서 사려고 많이 챙겨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한숨이 나왔다. 제품 아래 가격과 이름이 정확히 표시되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 한국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물론 여기는 다른 나라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도 불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격표와 상품이 뒤섞여 있어 계산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거스름돈도 두 번은 세어보았다.
숙소에 일찍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또 불안이 올라왔다.
그래서 억지로 누르지 않고, 마음과 조금 대화를 해보았다. 마음의 불만을 듣다가 끌려갈 거 같아서 초심으로 여기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세부에서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듯했다.
짧게 물놀이를 즐기러 오는 여행자들, 혹은 어학연수생들.
나는 그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세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정렬’이었다.
나는 온라인으로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이다 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나 자유로운 편이다. 다만 그렇다 보니 나의 일상을 루틴화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하기는 참 어려웠다. 특히 안정된 한국에서의 삶은 기계적으로 일하고 그저 쉬거나 시간을 때우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무언가를 부딪히고 만들어가기엔 에너지가 나지 않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자주 가던 태국보다는 모든 것이 리셋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곳인 필리핀이 나을 듯 싶었다. 나의 루틴이나 삶을 관찰하고 한 달 살기를 실험하기 좋다고 여겨졌다. 저렴한 가격도 도전하고 나아가는 것에 좀 더 수월하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영어를 부담 없이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가능하면 주말에는 워터 스포츠를 즐기며 나만의 루틴을 만들고 싶었다. 남들이 짜놓은 삶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일과 취미, 쉼과 인간관계를 재정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음식, 생활 편의성, 소음.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것이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겠지, 하고 넘겼다. 영어 튜터와 수영 레슨도 어느 정도 정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도 에어컨 소음은 계속되었다. 결국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에어컨을 끄고 잠들었다. 더위에 몇 번이나 깨면서 스트레스 때문인지, 최근 힘들게 했던 허리 디스크가 다시 올라왔다. 다리가 저렸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버거웠다. 마음은 더욱 고립감과 공허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얼룩져서 요동쳤었다.
둘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