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힘들게 잠들었지만 역시 아침에는 생각보다 에너지가 돌았다. 일어나자마자 좋아하는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빵,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몸이 조금은 회복된 듯했다. 가장 유명하다는 성당으로 향했다. 마침 행사가 있는 날이었는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톨릭 인구가 많은 나라라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 성당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낯설면서도 신비로웠다.
반바지를 입고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를 받고 잠시 멈춰 섰다. 실망한 표정을 지어서 그런가 누군가 다가와 긴바지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50페소.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내부와 벽화는 화려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은 따뜻했다. 웅장함 속에서도 묘하게 평화로웠다. 잠시 동안은 모든 불안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동은 주로 오토바이 택시를 이용했다. 태국에서 자주 타봤기에 익숙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의 시원함과 자유로움이 반가웠다. 그 순간만큼은 이곳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오후에 숙소로 돌아오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대가였다. 그제야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을까.’ 숙소 예약 내용을 보니 부분 환불이 어렵다고 했다. 호스트에게 협조를 구해야 했다. 정중하게 에어컨 소음을 이야기하며 부분 환불을 요청했다. 호스트는 환불 정책은 엄격히 유지하겠다고 하면서도 불편함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한 번도 에어컨 문제로 컴플레인을 받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수리 기사를 보내주겠다고도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고장이 아니었다. 창문형 에어컨 특유의 구조적 소음이었다.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액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더 머물 수는 없겠다는 결론이 났다. 에어비앤비 고객센터에 이의를 제기하며 동시에 다른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콘도가 창문형 에어컨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더 모험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가격은 좀 더 비쌌지만 벽걸이 에어컨이 설치된 호텔을 예약했다.
에어비앤비 고객센터에서 연락이 왔을 때, 상담원은 한국 사람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의 상황을 감정이 섞인 채로 쏟아냈다. 상담원은 차분히 들어주었다. 원칙상 호스트가 동의하지 않으면 어렵지만, 이번 건은 전액 환불을 해주겠다는 답이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새로운 숙소로 옮겼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숙소 근처에서 조용히 저녁을 먹고 쉬었어야 했다. 그런데 영어 선생님을 찾다가 알게 된 지인이 있었다. 내 필리핀 생활의 고충을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가 추천해 준 곳이 나이트 마켓이었고, 스테이크를 먹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갔다.
붉은 전구빛과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 묘하게 활기찬 에너지가 돌았다. 추천받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10분, 15분이 지나자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일하는 모습은 어수선해 보였다. 서로 소리를 지르고, 고기 굽는 시간을 놓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효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람들은 계속 오가고, 나는 스테이크를 들고 자리를 찾기 위해 서 있었다.
20분이 넘어서야 음식이 나왔다. 거스름돈 41페소 중 1페소가 없다고, 40페소만 건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 순간엔 크게 느껴졌다. 진짜 문제는 자리를 찾는 일이었다. 거의 모든 테이블이 차 있었다. “Have a seat?”을 열 번은 넘게 물었다. 다들 이미 자리가 있다고 했다. 가족이나 친구를 기다린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스테이크를 바닥에 내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지금 돌아보면 분명했다. 잠 부족, 스트레스, 혼자라는 외로움. 모든 게 겹쳐 있었다.
결국 이곳을 추천해 준 그 친구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다다다다 감정이 먼저 나갔다. 그러자 “okay”라는 한 문장이 돌아왔다. 현타가 왔다. 밥을 먹고 나왔다. 시간이 지나 진정된 뒤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답장은 단호했다. 자기는 부정적인 사람은 싫고, 더 이상 연락하기 어렵다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굳이 붙잡고 싶지 않았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 같았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니, 내가 무너져 있었던 게 더 맞겠다. 마음은 심란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날 밤은 조용한 에어컨 아래에서 깊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