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오가는 하루

by 시더루츠

아침은 멀쩡했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숙소 근처 도교 사원이나 가볼까 생각했다.

이제 새로운 숙소에서 잠도 잘 잤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광객처럼 하루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토바이 택시 앱이 오류가 났다. 큰일이었다. 그랩 자동차는 비싸고, 교통 체증도 심하고, 무엇보다 불편해서 거의 타지 않는다. 오토바이 앱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한국 번호로는 작동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만 쓰고 있었는데, 그게 멈춘 것이다. 여러 번 시도해도 오류. 앱을 지우고 다시 설치해도 오류.

CS에 연결하려고 보니 전화번호만 있다.

나는 eSIM이 데이터 전용이라 통화를 못 한다. 채팅 상담은 연결 방법이 없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나 여기 갇혔구나.’ 숙소는 편했지만 위치가 좋지 않았다. 오토바이 택시가 없으면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부담스러웠다. 이동을 못 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그냥 교통수단 하나 막힌 건데, 내 여행 전체가 막힌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오토바이를 타는 건 여기서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마저 안 된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모든 걸 숙소 안에서만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욕이 자동으로 나왔다. ‘시발’이라는 말이 거의 실시간으로 나왔다. 일단 번화가까지 20분을 걸었다. 자주 가던 식당에 도착해 밥을 먹었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화가 나 있었다. 갑자기 한국행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가까운 날짜의 편도가 50만 원. 왕복 27만 원에 왔는데 편도가 50만 원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허탈한 웃음.


그 순간, 필리핀의 어떤 것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최대한 버티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음 주에 예약해 둔 수영과 영어 수업을 모두 취소했다. 어차피 못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너무 수고롭고 버거워 보였다. 나는 사람을 만나러 왔고, 새로운 경험을 쌓으러 왔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고,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도 피곤했다.


카페에서 글을 쓰며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래도 뭔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심카드를 하나 사서 다른 오토바이 앱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심카드를 사서 끼우려는데, 유심 핀이 없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구매했던 곳으로 돌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핀을 잠깐 빌려주었다. 교체를 마친 뒤 물었다.

“이 핀은 제가 가져가도 되나요?”
“No.”
“그럼 살 수 있나요?”
“No.”
“그럼 나중에 한국에서 교체할 땐 어떻게 하죠?”


직원이 귀를 가리켰다. 귀걸이의 뾰족한 부분을 쓰면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했다.
“나는 귀걸이가 없는데요?”


그 이상 실랑이할 에너지는 없었다. 그냥 나왔다.

그때 알았다. 아침에 가지고 온 선글라스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갔었던 식당과 카페를 모두 가봤다.

없었다. 잊어버렸다. 더 힘들 정신도 없었다. 일단 해보려고 했던 오토바이 앱을 켜봤다.

다행히도 이번엔 작동이 됐다. 오토바이를 타고 카지노로 향했다.


기사 아저씨는 이상하게 친절했다. 차로 가면 500페소인데, 오토바이는 170페소였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팁을 조금 더 드렸다. 카지노에는 사람이 많았다. 소액으로, 규칙을 정해두고, 1시간 반 정도 즐겼다. 조금의 수익이 났다. 피곤해서 더 하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오토바이에서 현타가 왔다. 아침엔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했는데, 기분이 아까보단 많이 나아졌다. 지금은 돈을 따서 괜찮은 건가? 만약에 돈을 잃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으려나?

그리고 아침의 나는 뭐였지. 그 절망은 진짜였을까, 과장이었을까. 복잡했다.


물론 그 순간엔 진짜였다. 갇힌 느낌도, 고립된 느낌도, 여기서 아무 기쁨도 못 느끼고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그런데 진정하고 찾아보니 길은 있었다. 다른 앱도 있었고, 다른 방법도 있었고, 낯선 사람의 친절도 있었고, 내가 멈출 줄 아는 힘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맥주로 마무리한 뒤 카페에서 글을 쓰려했지만 한국에선 당연하게 여겼던 노트북 220 볼트 충전이 되는 곳도, 안정적인 와이파이도 찾기 어려웠다.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숙소로 돌아왔다.


기묘하게도, 아침에 그렇게 안 되던 택시 앱이 밤에는 다시 잘 되었다.


숙소에 와서 쉬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원래 다들 이렇게 여행하는 걸까. 내가 너무 통제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이게 그냥 인생일까. 나는 왜 이렇게 극단을 오가는 경험을 하는 걸까. 어쩌면 필리핀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가 기대를 크게 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확장된 내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일상생활의 사소한 불편들이 너무 피곤했다. 한국에선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하나하나 쉽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 물건 아래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은 것까지 신경 써야 했다. 수업도, 숙소도, 걷는 것도, 음식도, 카페도 어느 하나 긴장 없이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해외니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소한 불편이 쌓여, 쉽게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모든 통제를 잃었다고 느꼈을 때 유일하게 글쓰기와 카지노를 떠올렸다. 둘 다 통제 가능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래도 기분 좋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침의 화났던 내가 낯설게 느껴지고, 저녁의 침착한 나는 당연해 보인다.

역시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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