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흔들릴 때 찾아오는 질문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이런 질문은 누구나 던지지만, 삶이 순탄할 때는 잘 떠올리지 않는다. 즐겁고 무언가에 몰두할 때는 굳이 존재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삶이 버겁고 우울할 때, 우리는 바둑판 위의 플레이어에서 한 발 물러나, 훈수꾼처럼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몸과 마음이 게임에서 벗어나, 생각으로만 들어가는 순간이다. 로봇처럼 냉정해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삶의 근본을 묻게 된다.
삶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파도 같다. 잔잔할 때는 모래성을 쌓으며 몰두하고 즐거움을 누리지만, 불현듯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 앞에서 사람은 나약해지고,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결국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시 모래성을 쌓을 수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염세와 허무주의로 빠지고, 의미를 찾고 긍정하더라도 쾌락이나 현실도피로 기운다. 어느 쪽이든 결국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다.
인간은 본래 사랑과 두려움을 포함한 모든 것을 경험하며 받아들여야 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과 행복만 좇고, 두려움과 고통은 피하려 든다. 그 결과 삶은 불균형해지며 동시에 진정한 사랑도, 두려움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다. 피하려는 습관 때문에 고통은 왜곡되고, 행복은 얕아진다. 삶의 깊이는 결국 ‘양쪽을 수용하는 용기’ 속에서만 열린다.
마음의 고통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을 흔드는 결과다. 트라우마, 선입견, 상실감,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깊이 들어가면 그 근원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다.
삶은 겉보기에 평탄해 보여도, 누구나 수없이 껍질을 깨는 과정을 반복한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인간 역시 두려움과 고통을 통해 껍질을 깨야 새로운 자유와 변화를 얻는다. 이 과정은 늘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이 행복만큼 고통도 받아들여야 완전해진다고 말하며,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을 강조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행복과 고통을 모두 맛보아야 하기에 버틸 만한 몸과 마음의 체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몸의 체력은 운동이 지켜주고, 마음의 체력은 행복이 채워준다. 든든한 체력 아래 몰아치는 고통과 사랑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긍정과 행복으로만 점쳐진 삶은 반쪽짜리 인생이다. 부정과 혐오로만 물든 삶 역시 반쪽짜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몰아치는 파도는 늘 반대편 문을 두드린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균형을 잡게 한다.
삶의 질문은 고통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소화하고 흡수할 때, 우리는 더 큰 사랑과 행복을 깨닫게 된다.
깨는 과정 없이는 나오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