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톤의 고독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by 도토리

주말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거리의 아버지의 집에 갔다. 10살 아이는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쓰레기봉투를 사서 무작정 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막막하기만 했다. 알콜성 치매를 앓다 가셨기에, 집에 똑같은 물건과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이 너무 많았다. 일단 새 제품들은 모두 분류했다. 속옷도, 양말도 새것이 넘쳐났다. 정작 베란다에 널린 것들은 낡아 해진 것들 뿐이었는데.

당뇨 합병증으로 늘 발에 상처가 있으셨던지라 솜과 소독약이 넘쳐났고, 밴드가 몇 박스나 나왔다. 두통을 앓으셨는지, 타이레놀이 많았고 녹내장으로 인해 안약이 몇 박스가 나왔다.


평소에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과 30년이 넘도록 이어온 그에 대한 원망들이 참 부질없다 느껴졌다.

사람은 없고 흔적만 가득한 집에서, 나는 홀로 집에서 상처를 소독하고, 라면을 끓여 먹고 집에 있는지도 모르고 또 물건을 주문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가 남긴 물건들에서, 그의 삶이 보였다.


짐이 어찌나 많은지, 가구도 가전도 다 처리하기가 힘들어 결국 폐기물업체를 불렀다. 남편과 둘이 이틀 동안 치우고 버리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혼자 사시던 집에 폐기물만 4톤이 나왔다. 170만 원. 그마저도 다 못 싣고 간 장롱과 장식장들의 스티커 비용은 별도였다.


4시간 동안 놀이터에 앉아 직업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동네에 할머니들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셔서, 이사 가냐고 물으시는지. 집에서 돌아가신 거냐며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시는 분들. 포장도 뜯지 않은 세제와, 휴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이 지역의 쓰레기봉투까지 모두 구경 중이던 할머니 분들에게 드렸다. 할머니들은 연신 고마워하며 한껏 웃으며 돌아가셨고, 나는 그분들이 아버지의 등산스틱과 새 운동화 등을 챙기는 것을 이따금 웃으며 바라보았다.

"사진을 좋아하셨나 봐요."

"네. 그러게요."


작업반장님이 말씀하셨다. 사진이 취미셨던 아버지는 집안 곳곳에 수상한 사진들을 걸어놓으셨다. 이름 모를 꽃들이나, 어디 갈대숲의 사진들. 나는 사진들을 챙기지 않았다. 그저 카메라와 렌즈들을 챙겼다. 잘은 모르지만, 카메라도 중고로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 수많은 이젤과 액자들이 집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꾸며놨던 군인 시절 사진을 담은 앨범이 포대자루에 실려나갔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을 정성껏 잘라 오려 넣은 그의 젊음이 느껴져, 왠지 모르게 낯설어졌다. 내가 모르는 그의 삶이 더 많았겠지, 싶었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아이가 아는 나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이 아니던가. 취미로 즐기셨지만, 한 번도 귀 기울여 들어본 적 없는 기타도 포대자루에 실렸다.


모든 것이 끝나고, 우리 부부는 텅 빈 집에서, 트럭에 덮개를 씌우고 떠날 채비를 하는 트럭들을 멍하게 바라봤다.


왜 그렇게 사셨는지. 원망은 없다. 왜 그때 더 찾아뵙지 못했을까, 더 마음을 쓰지 못했을까,라는 후회도 없다.

그저, 죽음 이후의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지금보다는 편안해지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한다.

모든 신체에 병이 들어 기억을 잃어가며 외로움과 고독함에 매일 쓸쓸한 인생이 아니라, 인자하게 웃는 영정사진의 그 모습처럼, 다른 삶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계시겠지, 라며 생각한다.

다음 생에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지 말고, 그저 자신으로만 살기를. 가족에게 매일 욕지거리를 하며 손을 떨면서도 술을 찾던 그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평온함과 마음의 여유를 갖기를.

그리하여 그도 반드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를.


대학교 졸업식에 아버지가 입고 왔던 양복을 꽉 찬 의류수거함에 억지로 밀어 넣고 뒤돌아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애도할 수 없는 자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