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할 수 없는 자의 장례식

평생 미워했던 아버지를 보내고 오는 길

by 도토리


정말이지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었다. 머릿속에 수만 번도 넘게 상상해 온 일이었다.


67세의 젊은 나이로,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갈비뼈가 다 으스러질 정도의 심폐소생술에도 그는 소생하지 못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10년 동안 그는 혼자 살았다. 평생 동안 하루도 끊지 못했던 술, 매일 반복되는 반주와 홀로 차려 먹던 라면 따위의 부실한 식사. 병은 깊어갔고, 그의 몸은 빠르게 망가져 갔다. 나는 외면했다. 10년 동안 아이를 데리고 5번도 가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의 만행에 대한 대가라고 믿었다. 말 못 하는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맞으며, 아버지 퇴근 시간만 되면 장롱 안에 숨어 숨소리를 죽인 내 어린 시절이 받는 보상이라고 여겼다.


그의 죽음에도 도저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유튜브에 넣어놓은 재생목록을 들으며 병원으로 향했고, 운전 중 병원 응급실 의사에게 사망 소식을 들었다. 30분 동안 받아주는 대학병원이 없어 뺑뺑이를 돌다가, 겨우 도착한 병원에서도 30분 동안 CPR을 하고 약물을 주입해도 생체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했다.

오전 10시 3분.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부고 문자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챙기러 들어간 집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산처럼 쌓여있는 약봉투와 분뇨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식탁에는 요양보호사가 전날 점심에 차려놓은 밥이 그대로였다. 서둘러 소파 위에 있는 휴대폰만 챙겨 들고 도망치듯 집에서 나왔다.


병원에 도착하자 형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인 조사를 해야 하니, 경찰서로 오라고 했다. 응급실 원무과로 가서 결제를 하고, 시체검안서에 틀린 주소를 바로잡고, 병원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묻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곳은 작은 병원이었기에, 근처 장례식장에 전화를 해서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장례식장에서 온 직원 두 명이 베드를 가져와 시신을 옮겼고, 나는 기둥 뒤에 숨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할 때 가위로 잘랐던 옷이라며 쇼핑백을 건넸다. 쇼핑백에서는 지독한 분뇨 냄새가 가득했다. 사람이 죽을 때 항문이 먼저 열린다더니, 맞나 보다. 예전에 배변 훈련이 안 된 개를 키운 적이 있는데, 외출하고 돌아오면 온 집안에 오줌을 싸 놓고, 그걸 또 밟고 놀며 온몸에 냄새를 풍기던 그 녀석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병원 구내식당에서는 카레 냄새가 진동을 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냄새가 뒤섞여 역한 기분이 들었다.


워낙 서로 왕래가 없는 소위 콩가루 집안이라, 친척들이나 지인들 번호를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리 시도해도 패턴이 풀리지 않는 아버지의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네 번만 더 시도하면 데이터를 초기화시킨다는 경고 문구에, 손길을 멈추었다. 요양보호사도 패턴을 모른다고 했다. 워낙 의심이 많으신 분이라, 집 비밀번호도 매일 바꾸신다고 했다. 30년 전에 이혼한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 했고, 물어물어 아버지의 형제 중 한 사람과 통화가 되어, 부고 소식을 알렸다.


시신을 따라 도착한 장례식장에는 10년 만에 만나는 친언니와 형부가 있었다.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아이가 벌써 8살이라니. 어색함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형부의 이야기를 건조하게 들었다. 성격도 넉살이 좋은 분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언니가 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으니, 민망하셨겠지.


사실상 전날에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고, 채 30명도 오지 않을, 아버지의 형제들과 조카들 정도만 오는 장례식이었기에, 3일장을 할 필요가 없이 바로 다음 날 발인 날짜를 잡았다.


장례식장 사무실에서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수의, 관, 유골함, 화단, 식사, 리무진, 비품들을 골라야 했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그 말과 프레임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30년을 떨어져 산, 지독히도 아버지의 전화를 다 차단하며 그의 존재를 혐오하던 언니는 무슨 죄책감인지 내가 고른 것들보다 더 비싼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빈소나 화단의 크기, 유골함 각인, 면장갑 하나까지 다 하나같이 정상적인 가격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맥주 24개가 들은 2박스의 가격은 14만 원이었고, 리무진 차는 편도로 48만 원이었다. 국화로 장식한 화단은 100만 원이었고 상복을 빌리는 데 17만 원이었다.

내가 얼마를 쓰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는 정도의 속도와 가격들.

모든 것이 다 돈이었다. 징그러웠다. 모든 것이.

올 사람이 너무 없으니 식사 50인분까지는 주문할 수가 없다고 읍소하니, 상담 직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70억을 들여서 이런 장례식장을 운영을 하는데, 사실 식사에서 제일 이윤이 나는데 그걸 안 하면 우리는 너무 적자니 지금 시신을 옮겨 나가셔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30인분만 해달라 사정했다.

죽음조차 이윤이 남지 않으면 문전박대당하는, 지독한 장사의 현장이었다.


빠르게 결정을 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고 오고 있었다. 전철을 타고 2시간 40분이 걸린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남편이 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식사와 상복이 준비될 때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기에, 장례시작을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저녁 6시가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갑자기 타는 것처럼 목이 너무 마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가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그 자리에서 다 마셨다. 그렇게 마셔댔는데도, 이상하게 목구멍이 묵직했다. 분명히 슬프거나 눈물이 나는 건 아닌데, 역하고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아이를 지하철 역에서 데리고 와, 썰렁하고 조용한 장례식장을 지켰다. 드라마에서나 보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그 와중에 머리도 좀 매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 염색을 좀 시킬걸. 형부보다 나이가 많은 내 남편의 흰머리가 신경 쓰였다. 황망한 얼굴로 울고만 있는 언니와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언니는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볼 때면, 그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살면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25년 동안 아버지와 살면서 사람 취급 못 받고 맞고 산 건 난데, 10살까지 같이 산 본인의 트라우마를 내가 건든다고 했다. 이해했다. 유치원 시절에 엄마와 헤어진 나와는 달리, 4살이 많은 언니는 엄마가 아버지한테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다 기억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 평생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며,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고 했다. 양육비 한 푼 주지 않았던 그의 비정함이, 그럼에도 막내를 데려가 엄마보다 잘 키우고 있다며 부러 소문내고 뽐내던 그의 허세가 다 역겨웠을 것이다. 이해했다. 나의 어떤 성격이, 말투가, 행동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서로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하는 그 세월들에는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출석하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건조한 얼굴로 경찰서로 향했다. 신호를 기다리며 주식창도 한 번씩 봤다. 미국 대통령이 또 사고를 쳐서 주식이 곤두박질쳤다. 무표정으로 어플을 닫았다.


10년 동안 왕래가 전혀 없었나요?

전혀는 아니고, 몇 달에 한 번씩 연락이 오시면 받았습니다.

살고 있는 집에는 가 보셨나요?

부고 소식을 듣고 고인의 휴대폰을 찾으러 가 본 것 말고는, 처음 가 봅니다.

다른 가족들과도 왕래가 없었나요?

지병이 있으셨나요?

술을 드셔 왔기 때문에, 늘 지병이 있으셨습니다. 요양보호사 말로는,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매일 술을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참고인 조사를 받는 동안, 낡은 형사과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도, 유치장도 너무 낡아 보였다. 나라는 뭐 하나. 국가 공무원들이 저런 취급을 받고, 이렇게 열악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나. 그런데, 신입 형사님인가 보네. 20대로 보였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천하에 불효자식으로 생각하겠지. 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형사님과 아버지의 집에서 만나 집을 둘러봤다. 형사는 연신 사진을 찍고 약봉투를 찍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점이 석연치 않았는지 CCTV도 확인한다고 했다. 처방전을 찾아달라 하여, 알겠다고 했다.


나도 처음 가 보는 아버지의 집이었기에 물건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언제 이사를 하셨지. 모르겠다. 이사를 하는 데 혼자서 힘드니 좀 도와줄 수 있겠냐는 말을 수화기 너머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바쁘다고 했다. 소파에서 일어나다가 발을 헛디뎌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다쳤는데, 신장 수치가 안 좋아 수술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병원에 좀 데리고 가 줄 수 있냐고 해서,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아이가 입원 중이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지랄.


집 안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무래도 오전이 아니라, 전날에 사망하신 듯했다. 요양보호사가 점심을 차려놓고, 어르신, 식사하세요,라고 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했다. 그녀는 집을 떠났고 다음 날 오전에 아버지의 숨이 멈춘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전날 한 번만 흔들어 깨워주지, 괜한 원망도 들었다. 평생 동안 마신 알코올로 인해 치매를 앓고 계셨고, 그로 인해 본인의 성정이 한 번씩 드러나 요양보호사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일상이었다고 했다.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만 흔들어 깨워주고, 낮에 구급차를 불러주지. 그럼 내가 임종은 봤을 텐데. 생각이라는 걸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자리를 지켰다. 열 살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검은 치마를 입은 엄마의 모습이 신기하고 예쁘다며 헤실거렸다. 엄마 예쁘냐고 씩 웃으면서 머리를 정돈하고, 오시는 손님들에게 절을 했다. 아이는 부고 봉투에 그림을 그리느라 바쁘고, 난생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형제들을 마주했다. 어른들이 네 딸이 벌써 10살이냐, 하며 건네는 오만 원짜리에 아이는 설레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돈을 흔들어 보였다. 예의 있게 행동하라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방에 돈 넣어두라며, 잃어버린다며 잔소리했다.


병원에서 병사한 것이 아니라, 발인을 하고 화장을 하려면 검사의 검시필증이 필요한데, 장례식장에서는 밤 12시까지 서류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 날 화장터 예약을 취소해야 한다고 했다. 안달이 났다. 오늘 오는 20명도 안 되는 조문객이 다인데. 당장 다음 날 아침만 해도 올 손님이 한 명도 없는데, 막막했다. 그러다가 문득 억울해졌다. 생전 장인어른 얼굴을 장례식장 사진으로 처음 보는 형부가 괜히 괘씸해서, 형사 연락처를 건넸다. 검시필증이 언제쯤 나오는지 문의 한 번 해보시라고 했다. 나도 아버지한테 잘한 게 전혀 없는데, 그의 고독사를 만든 건 25년 동안 키운 난데, 애먼 사람에게 골이 났다. 나도 부모가 돌아가신 게 처음이라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남편은 자리에 없고 언니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돗자리에 앉아 계속 울고 있고.


밤 11시에 검시필증이 나왔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지방에서 속속들이 도착했고, 보자마자 너는 왜 돼지같이 살이 쪘냐, 남편이 벌이가 좋냐, 왜 집에서 놀고 있냐 독설들을 쏟아냈다. 익숙했다. 제가 좀 살만해서 살이 쪘죠, 걱정이 없어서 신간이 편합니다, 하하. 하면서 웃었다. 누구는 맞절을 끝내자마자 언니는 이렇게 말랐는데, 너는 왜 이렇게 살이 쪘냐 하며 등짝을 내리쳤고, 제가 다 뺏어먹어서 그렇죠, 하며 헤실거렸다. 이게 다 인덕입니다, 하며 눈을 흘기며 웃기도 했다.

지랄. 사람 좋은 척하는 내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음식을 차리고, 버리고, 차리고, 버렸다. 음식은 맛이 없었고, 냄새들은 역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치매를 앓고 가셨기에,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30년 전 이혼한 부인이 내 재산을 노리고 있다, 탐정을 시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둥.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친척들에게 전화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이가 안 좋은 형제들은 연락을 끊고 살지 않고 자주 연락해 싸웠다. 이해할 수 없는 가족들이었다.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황망한 두 딸을 위해 4시간을 달려온 엄마는 온갖 부풀려진 헛소문에 시달리다 못해 자리를 뜨셨다. 평생을 엄마 손에 큰 언니는 아버지의 친척들이 싫다며 자리를 피했고, 아버지 손에 큰 나는 무례한 친척들이 있는 식당에 함께 자리 잡고 앉아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그들과 사소한 농담을 시시덕거렸다. 형제들 누구도 조문하며 눈물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그래도 그중 제일 내가 의지했던 막내삼촌 내외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큰아버지가 너에게 아버지가 남긴 고향 선산을 달라고 할 거라고. 절대 주면 안 된다고 했다. 그 땅의 존재도, 가치도, 가격도 모르지만, 괜한 오기가 들어 알겠다고 했다. 평생 동안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던 큰아버지 내외가 다음 날 화장터까지 온다고 했다. 이유가 짐작 가능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두 시간 정도 머무르고 갔다. 어느 누구도 화장터의 위치를 묻는 이가 없었다.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언니의 지인들만 오기에 우리 가족은 외투를 챙겨 입고 근처 모텔로 향했다. 내 지인에게는 아무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운전한 시간만 5시간이 넘었다. 팔도 저리고 머리도 깨질 듯 아팠다. 몸에서 나는 향냄새가 역해서 벅벅 비누칠을 연신 했다.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아이도 나도 남편도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 장례식장에 돌아가니 언니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저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효녀였으면, 전화나 좀 받지. 평생 아버지가 너무 싫다며 끝끝내 전화도 차단하고, 결혼도 몰래 했으면서 뭐가 저렇게 슬퍼서 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너무 멀쩡한 나와, 너무 안 멀쩡한 언니를 반 섞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발인을 했다. 염을 하는데, 극구 들어가지 않겠다는 나를 엄마가 밀어 넣으셨다. 그래도 마지막 모습이니 봐야 후회가 없다 하셨다. 당뇨로 이빨도 다 빠지셨었는데, 화장을 한 아버지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보다 좋아 보였다. 장례 지도사가 수의를 입고 계신 아버지의 주의를 돌라고 했다. 머리도, 손도, 발도 만지라고 했다. 도저히 만지고 싶지 않았다. 더럽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몸을 만지면, 냉동해 두었던 내 감정들이 얼음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손은 옷깃만 대충 잡고, 발도 버선을 휙 스쳤다. 입관을 할 때 사위들이 몸을 당기고, 딸들은 밀라고 했다. 정말이지 만지기 싫었다. 저 손이 술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내 밥을 차리고, 나를 위해 돈을 벌었던 손이라. 평생 나밖에 없다 붙잡던 손이었기에. 미는 시늉만 했다. 형부는 연신 눈물을 삼키며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언니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뒤돌아 울기만 했다. 나는 표정 없이 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 뚜껑을 닫기 전, 사위들이 준비한 노잣돈을 관에 들어간 아버지의 몸 위에 놓았고, 장례지도사는 자식들이 노잣돈을 준비했습니다,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노잣돈으로 몸의 위아래를 훑더니 돈을 따로 챙겨 넣었다. 관례라는 건 알지만, 모든 게 다 혐오스러웠다. 관 뚜껑을 닫고, 알 수 없는 한자가 쓰인 천을 몇 개를 덮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빈소에 가니 상이 차려져 있었다. 30만 원짜리 상. 겨우 저게 30만 원인가. 픽 웃음이 나왔다. 별건 없었다. 시키는 대로 몇 번의 절을 하고, 또 일어나서 묵념을 하고 또 몇 번의 절을 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사용한 도마나 행주, 슬리퍼, 칫솔, 편육, 술병들을 계산하고 또 반품하는 과정들을 거쳤다. 계속 앉아서 울고 있는 언니와 사망신고를 하러 간 사위들. 뜯은 건 반품이 안 되니, 아까운 것들은 차에 실어 넣었다. 콜라 몇 캔, 5만 원짜리 커피 믹스 한 통, 만 원짜리 삼선 슬리퍼 등. 독살스럽게 차에 챙겨 넣었다.


마지막 결제를 기다리며 엄마와 차를 마셨다. 혹시나 새어머니와 서류상으로 이혼이 잘 되어있는지 확인 안 해봐도 되겠냐는 말씀에, 재판으로 이혼하신 거라 괜찮다고 했다. 재판으로 이혼하신 건 모르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나를 너무 때려서 몇 번을 경찰에 신고하고, 가정폭력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경찰로 인해 다시 풀려난 아버지한테 또다시 맞는 날의 연속이었다. 새어머니의 이혼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중학생인 나는 탄원서를 썼고,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고함을 들으면서, 재판에서 그의 폭력과 폭언들에 대해 증언했다. 새어머니가 나를 키워준다고 약속하셨다. 재판이 끝나고, 아버지는 짐을 챙겨 나갔다. 나는 새어머니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바뀐 비밀번호는 알 수가 없었다. 발이 꽁꽁 얼도록 계단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고 울다가, 아버지의 집에 찾아갔다. 무릎을 꿇고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끝내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아직 능력이 없으니 키워달라는 말만 했다. 몇 번의 뺨을 맞으면서도 빌고 싶지 않았다. 그 겨울의 공기가 아직도 서늘하게 콧잔등에 남아있다. 엄마는 네가 살면서 고생이 많았다고, 엄마의 몫이었는데 네가 겪었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그때 집을 나갈 때 언니만 데려갈 게 아니라 너도 데려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지나간 일이라 미움도 원망도 남아있지 않다며 웃었다. 멀리 빈소 앞에서 울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돌아온 형부와 함께 장례식장 사무실로 가서 계산을 했다. 반반 정확하게 나눠 계산을 했다. 현금으로 해야 30만 원이 할인된다고 하여, 이체를 하고 현금영수증도 야무지게 챙겼다. 장례비 영수증을 챙겨야 상속세 공제가 된다고 했다.

짐을 챙겨 발인을 하고 리무진에 타는 아버지의 관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차를 보고 핫도그 같다며 웃었고, 나는 미소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정사진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인어른의 영정사진을 들고 형부는 눈물을 보였다. 의아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울고 있었다. 그의 성정을 겪어온 나와 남편,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는 내 아이만 멀뚱히 서 있었다.


화장터로 가서 결제를 했다. 120만 원이었나. 참 쉽게 쓰이는 돈들이었다. 평소 같으면 벌벌 떠는데, 이틀 동안 도대체 얼마를 쓰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화장터로 아버지의 관이 들어가고, 대기하는 방에서 사 온 김밥을 먹었다. 흔들리는 고속버스에서 상한 김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3시가 되어, 아이를 굶길 수 없어 사 온 김밥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장례식장에서 챙겨 온 콜라로 겨우 김밥을 밀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화장까지는 2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검사님이 아무래도 너무 젊은 나이에 온 죽음이 석연치 않다며, 통화기록을 보고 싶다며 아버지의 생전 휴대폰을 가져다 달라했다. 안 그래도 화장이 끝나면 아버지의 집에 가서 부동산 계약서를 찾으려 했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화장을 기다리는 가족 대기실은 너무 더웠다. 나까지 불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뜨겁게 해 놓는 걸까. 보일러를 낮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전광판에 '수골 중'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아이를 대기실에 놔두고 언니와 형부, 나와 남편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뼈 가루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플라스틱 쓰레받기로 담아 통에 넣고 뼈를 분쇄했다. 고글과 마스크를 쓴 직원이 분쇄통에서 유골함에 가루를 탈탈 털어 넣었다. 저 통에는 수많은 사람의 유골이 다 섞여 있겠지. 그럼 아버지의 유골함에도 다른 사람의 뼈 가루가 섞이려나. 그럼 그분들끼리 고인들끼리 좀 친해지려나. 괜한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골함을 넣는 공간은 선택할 수가 없고 온 순서대로 넣는다고 했다. 맨 아래 자리였다. 참, 운도 없지. 그렇게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자리까지 가장 낮은 곳을 배정받았다.


사진을 넣고 싶은데, 나중에라도 넣으려면 오늘 화장터에 접수를 한 자식만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유골함 자리를 계약할 때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내가 하지 못했다. 하필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도, 요즘 애들이 한다는 모바일 신분증도 없었다. 나는 언니 연락처도 모르는데, 유골함 칸을 꾸밀 수도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서둘러 마무리하고, 언니네와 헤어졌다. 메마르게, 수고하셨어요. 상속 관련해서는 제가 처리하고, 연락드릴게요,라고 말하고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 부동산 계약서와 신분증을 찾았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단 돈 천 원도 아까워했던 사람이었기에, 세월이 지난 통장이 많이도 나왔다. 무슨 억만금을 모으겠다며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전날 창문을 열어놓고 갔는데도, 집안에 시체 썩는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이는 코를 움켜쥐었고, 소파에 잠깐 앉아 기다리라 하고 물건을 챙겼다. 대충 둘러보고, 아버지의 휴대폰과 처방전 한 뭉텅이를 챙겨 나왔다. 처방전이 많기도 많았다. 지갑에는 온갖 대학병원 진료카드가 꽂혀있었다. 참 많이도 아팠던 삶이었구나. 평생의 고집으로 보험 하나 들어놓지 않고 다 현금으로 결제한 흔적이 보였다. 돈이 아까워 진료는 어찌 받았을까 싶었다.


경찰서로 향하는 차에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아이는 엄마가 우니 따라 울기 시작했고, 남편은 연신 내 손을 쓰다듬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가셨어야지. 그리고 나한테도 죄송하다는 말 듣고 가셨어야지. 끝까지 왜 다 자기 마음대로냐며 울면서도 소리쳤다.


늦은 밤이 돼서야 집에 돌아와 아이를 씻기며, 또 엉엉 울었다. 재워달라는 아이와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밤이 늦도록 남편을 붙잡고도 끝이 없이 울어댔다. 울 자격은 있나. 그렇게 울음을 토해내며, 목에 하루 종일 걸려있는 먼지 같은 이물질을 뱉어내고 싶었다.


장례가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는 지금까지도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원인을 모르겠다. 진통제를 먹어도, 두통이 나아지지가 않는다. 울음을 더 토해내야 할까. 유품도 정리해야 하고, 부동산도 정리해야 하고. 공과금도 쌓여있을 텐데. 모든 일을 다 우리 쪽에서 하고, 재산을 반으로 나눠 언니에게 주기로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모르겠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 아버지의 집을 많이 가야 할 것 같다. 모든 게 다 지랄 맞은 날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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