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추구하려는 것은 명예심인가? 단순 생존인가?
❷인간이 추구하려는 것은 명예심인가? 단순 생존인가?]
①마빈 해리스식의 경제적 이유?
유물론적인 사유를 지닌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는 명예심 대신에⎯ 신체적인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세계와 인성을 이에 기반한 긍효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에 관한 세 가지 견해를 살펴보려 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위신 추구는 생태계의 적응일 뿐인가? 자신을 스스로 [문화 유물론자(唯物論者: Cultural materialism)]라고 명명한 마빈 헤리스*는 ┈그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학자들, 특히 대다수 유물론적인 학자들의 공통된 경향이 그러하지만┈ 문화를 생태계에 대한 적응, 즉 신체적 생존 양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에 의하면*
**마빈 해리스: ❰문화의 수수께끼❱ 박 종열 역[한길사] 1985(5판).
본고에서의 야노마모 족과 카오카 족의 사례는 위의 그의 저서에서 뽑은 것이다. 그의 저서에는 여기에 인용한 것보다 훨씬 방대한 분량의 사례들이 실려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는 직접 읽어봄이 좋을 것임. 이하에 인용된 〚쪽〛수는 모두 이 책의 쪽 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하는 대인들의 열망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식량과 귀중품을 생산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자급 자족적 생산수단을 지니고 있는 자연조건하에서 경쟁적으로 축제를 개최하는 것은 전쟁이나 흉년 등의 위기 시에 노동 생산성이 최하 수준 이하로 하락하는 것을 막는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쟁적인 축제의 개최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기대치를 광범위하게 확대해가는 조직망이 형성된다.……….
결국 대인들의 경쟁적인 축제 개최는 각각 상이한 미시 환경 지대(microenviroments) ┈해안 지대ㆍ늪지대ㆍ고산지대 등에 정착하고 있는 일군(一群)의 부락들 간의 생산력에 있어, 해마다 크나큰 변동을 가져오는 것을 바로잡는 자동 평형 장치 구실을 하고 있다.〚103〛
“가장 성황을 이룬 축제는 자동적으로 그해의 생산에 가장 적당한 강우량과 기온ㆍ습도 등의 기후 조건을 갖춘 부락에서 열리게 될 것이다.”
대인 축제나 포틀래취는 대인 및 추장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위신 추구의 열망을 표현시켜 주는 하나의 행사이다. 그러나 해리스의 일관된 관점에서 보면 만족할 줄 모르는 위신 추구의 열망이라는 것은 경쟁적 축제를 통해 나타난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회가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회가 경쟁적 축제에서의 성공을 항상 명성과 연결시켜 주지는 않는다. 명성을 얻어내는 원천으로서의 경쟁적 축제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적절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해리스는 사실을 무가내하로 그의 인식 구조에 맞추어 생태계에의 적응이라는 합리적 견해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해석 자체가 해리스의 문화적 관점에 따른 편견이다. 그것은 또한 마빈 해리스 개인의 독특한 견해이기 이전에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문화적 시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가 피력하는 우회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견해에 따라서 대인들의 심성을 명료하게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목표는 신체적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실익이 아니라 대인 칭호가 주는 사회적 위신, 바꾸어 말하면 상대적인 우월 제시이기 때문이다.
마빈 해리스는 제시 본성적 행태를 저주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마법에 걸린 자들이라고 저주받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평등주의적인 생활양식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106〛
사실 마빈 해리스는 이 설명을 평등주의적 생활양식이라고 불러 자신의 의견이 아닌 것처럼 지적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강제적 보상심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등주의라고 부르는 생활양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나 관대하다는 말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속기를 잘하는 호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109〛.”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결과적으로 필자가 주장하려는 견해, 즉 자기 제시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②진화심리학적인 견해⎯ 생존과 번식[성 선택]: 유전자는 운반자인 개체의 분신인 자녀의 몸을 통해 자신을 후대에 전달한다. [자기 제시 개념]은 이름을 통해 자신을 후대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자녀의 몸이 유전자의 전달자라면 이름은 [자아]의 얼과 몸 모두를 드러내 보이는 제시의 전달자이다.
❹명예와 치욕, 체면과 위신
①체면치레
한자 문화권에 딸린 겨레들은 남 앞에서의 [체면]을 중시한다. 체면이란 자기를 잘나 보여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면목을 가리키며 이들은 남 앞에 서는 체면이 서도록 자신을 꾸미는 [체면(體面)치레]를 중시하여 체면이 깎이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이렇게 체면만 차리다가 결국 할 일도 못하고 먹을 것도 못 먹고 손해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속담에[체면이 사람 죽인다]라는 말이 있고 체면을 차리느라고 하잘 것 없는 사람에게 졸림을 당하는 것을 “체면에 몰린다.” 고 하며 체면이 서지 않아 부끄럽고도 분하면 “체면(이) 사납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우월성(優越性)의 의미를 좁히면 체면치레를 하려는 마음씨이기도 하다.
명예심과 체면치레릐 관계
➁[덮어 가리기[은폐(隱蔽)]
열등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자기 제시의 본성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열등함이 드러남은 수치가 되며 꺼려지는 일이어서 이를 감추어 덮으려고 하는 것이 제시자의 심리다. 은폐라는 것은, 이처럼 열등한 내용을 감추는 행동이다.
생물의 욕망 중에는 일반적인 평가에서 부정적으로, 곧 열등함으로 인정되는 일이 매우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의 욕망은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욕망은 쉽게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충족시키고 싶은 욕망을 열등하게 드러남을 피하는 방법은 남이 보지 않는 ┈곧 남이 의식하지 못하는┈ 때와 곳에서 분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이목이 빈번한 곳에서는 애써 참지만 남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열등한 짓을 비롯한 극악한 일 등 무슨 일이든지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사디즘으로 악명 높은 “[사드]의 유언장”에 관해 이야기 해 보자.
1772년 여름에 사드는 마르세유의 홍등가 매춘부 가운데 한 명에게 먹인 최음제가 부작용을 일으키면서, 졸지에 독살 미수 혐의로 수배를 받게 된다. 깜짝 놀란 그는 부랴부랴 외국으로 도피에 나서면서, 아내 대신 평소 자신의 불륜 상대였던 한 여성을 동반한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이란 다름 아닌 그의 처제였기 때문에 더욱 큰 스캔들이 벌어졌고, 이에 분격한 장모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위를 손봐주려고 벼르게 된다. 사위를 미워하던 장모가 국왕에게 호소하여 사면 없는 무기한 구금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사드는 이때부터 무려 13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4년 12월 2일, 사드는 결국 샤랑통의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는다. 유언장에서 그는 자기 무덤 위에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서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 달라고 당부했다.
“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점점 더한 악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http:ㆍnavercast.naver.comㆍcontents.nhn?rid=75&contents_id=7390 ✻필자가 문장을 줄이는 등 다소 고침.
증자(曾子)의 말대로 열 사람이 눈으로 보며 열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 이 얼마나 엄한 일인가?[十目所視하며 十手所指니 그 嚴乎인저!]* *예기(禮記) 42편 대학의 원문 傳文 제 1장. 399p
◉콰키우틀의 사회에서는 철저한 장자 상속제에 의해 재산과 신분이 양도되기 때문에 장자 이외의 자녀들은 지위와 재화를 획득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경멸적인 하층민으로 취급된다.
한 수장의 막내아들이 노예의 딸과 함께 먼 샛강으로 달아난 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회에서 막내아들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으므로 이것은 그 가족들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달아난 막내아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대단한 미녀었다.
그녀가 자라 혼기에 도달했을 때 수장의 장자{그녀의 아버지의 맏형인 큰아버지}가 그녀의 미모에 끌려 서로 간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친조카인 그녀와 결혼을 했다. 얼마 후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수장의 장자는 자기의 사회적 신분의 하나인 고귀한 이름을 그 아들에게 상속시켜 주면서 그의 가족과 장인ㆍ장모{사실은 그의 막내 동생 부부}를 데리고 그의 아버지인 연로한 수장을 찾아갔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막내 동생의 딸인 친조카와 결혼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치심을 느낀 연로한 수장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관념에 의해서라면 늙은 수장의 자살은 근친상간에 따르는 수치심 때문이었으리라고 바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콰키우틀의 관습에 의하면 근친결혼은 매우 일반적인 형태여서 그 때문에 수치심을 느낄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늙은 수장이 자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천한 평민에 지나지 않는 자기 막내아들의 소생에게 자기의 고귀한 수장의 이름을 상속시켜 준 데 대한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더럽혀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죽음과는 반대로 막내아들은 의기양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의 고귀한 맏형을 속여 자기의 딸과 결혼시킨 다음 자기 외손자를 위해 직함이 있는 이름을 얻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210p)” 늙은 수장의 자살과 막내아들의 의기양양함이 신체적 생존에 관한 일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제시에 관한 심성 때문이었을까?
➁한국의 과시 문화
그런데 이러한 과시 문화는 콰키우틀족에게만 있는 것일까? 술집에서 얼마간의 팁을 아끼려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듬뿍 집어주어 자신의 위신을 뽐내려고 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우리 한국인이 아니었던가?
콰키우틀족과 같은 과시 문화를 갖고 있어서 그들 문화가 사라진 현대에 과시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행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제시자는 수용자에게서 긍정 평가를 받고 싶어 한다. 부정 평가를 받으면 기분 나빠한다.
그러나 부정 평가가 무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무시란 평가를 하기는 하지만 무가치하여 우월 수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부정 평가라도 평가를 했다는 것은 그 내용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일단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임에 견주어 무관심은 제시의 목표인 수용 자체가 막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부정 평가보다도 더 낮은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