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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무경 Apr 30. 2024

공주(公主)

중국에 관한 지식: 중국의 용어




https://blog.naver.com/yejihanja/20184626344


왕의 딸을 의미하는 공주(公主)라는 명칭은 중국 한()나라 이후에 쓰인 황제(皇帝)의 딸에 대한 호칭이다

공주라는 명칭은 중국을 비롯해 한자 문화권에 드는 한국과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이 호칭이 일관되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청(淸)나라 말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는 있었으나 일정하지 않아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나라 이전이던 주(周: BC 11세기 ~ 771년)나라 때에 주나라 천자[天子 = 황제(皇帝)에 해당]의 딸은 왕희(王姬)라고 불렸으며 왕망(王莽: BC 45~ AD 23)의 신(新)나라 때에는 공주 대신 실주(室主)라 부르고 임(任)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왕의 아들은 왕자, 황제의 아들은 황자라고 불렀던데 비해 왕의 딸이나 황제의 딸을 공주라고 부른 것은 한나라 고조 유방 때라고 한다.


황제가 그 딸을 출가시킬 때 지존인 천자(天子)로서는 스스로 그 혼인을 주관할 수 없어서 삼공(三)*에게 맡겼다. 즉 삼공이 천자 딸의 혼인을 주관(管)했던 것이다.


*한나라 때의 삼공은 정부의 최고 관직인 승상(丞相)ㆍ태위(太尉)ㆍ어사대부(御使大夫), 또는 대사마(大司馬)ㆍ대사공(大司空)ㆍ대사도(大司徒)였음.


이처럼 천자의 딸의 결혼을 삼의 주관 아래에 치렀기 때문에 공(公)이 주관[또는 주혼자(主婚者)의 역할]을 했다는 뜻의 공주[公主]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한나라 제도에서는 이처럼 황제의 딸을 공주라고 부르는 동시에 황제의 자매는 장공주(長公主), 황제의 고모는 대장공주(大長公主)라고 했는데 공주 위에 덧붙인 장(長)이나 대(大) 라는 글자는 존숭(尊崇)의 뜻을 표시한다.


또 화친 등의 연고로 출가하는 종실의 딸이나 궁녀를 공주로 봉해 주기도 했다.


제후왕의 딸은 옹주[翁主]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옹(翁: 늙은이 옹)이란 말은 아버지라는 뜻으로 쓴 것이며 제후는 스스로 딸의 혼인을 주관했기 때문이다. 또 제후왕의 딸을 왕주(王主)라고도 했는데 이 역시 왕이 그 혼사의 주관자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제후 왕의 딸인 옹주나 왕주의 서열(序列)은 당연히 황제의 딸인 공주보다 한 등급 아래였다.


북송(北宋)의 휘종(徽宗: 재위 1101 ~ 1125) 때에는 주나라 때의 옛 제도를 숭상하여 공주를 제희(帝姬 - 주나라 때 왕희라 한데 비해 왕호가 왕에서 황제로 변했으므로 제희라 한 것임)라 하기도 했으나 남송(南宋)에서는 다시 공주라는 칭호로 돌아왔으며 명ㆍ청(明ㆍ淸) 양대(兩代)에는 횡제의 친 딸을 군주(郡主), 군왕의 딸은 현주(縣主)라고 불렀다.


청나라 때인 1636년에는 명나라를 모방해 황제의 딸을 공주라고 했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황후 소생은 고륜(固倫)공주라 부르고 비빈 출생이거나 황후의 양녀인 경우에는 화석(和碩)공주라고 불러 적서의 구별을 강조했다.


후한(後漢 25 ~ 220) 때에는 일반적으로 공주를 현공주(縣公主)라고 했는데 이는 모두 그들의 봉읍인 현(縣)에서 온 봉호(封號)들이다.


진(晉)나라 때의 공주 칭호인 군 공주(郡公主)도 공주의 봉호를 받기 전의 군(郡) 이름을 딴 것이다. 현 공주와 군 공주를 간략하게 현주(縣主) 또는 군주(郡主)라고도 했다.


수당(隋唐 581 ~ 907)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자나 제후왕의 딸들이 모두 군현에 봉해졌으나 태자의 딸만 군주라고 부르고 제후왕의 딸은 현주라고 불렀다.


개인으로서의 공주에게 붙여진 고유명사들은 예를 들어 안락(安樂)공주ㆍ태평(太平)공주처럼 명예를 기리는 좋은 뜻을 사용해 짓기도 했으나 보통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봉읍으로 내려준 지명에 의해 지어졌다.


한 나라의 뜻인 국(國)을 사용해 지은 영국(寧國)공주나 곽국(霍國)공주를 비롯해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BC 140 ~ 87)의 고모인 관도(館陶)공주, 광무제(光武帝: 재위 25 ~ 57)의 딸인 무양(舞陽)공주ㆍ열양(涅陽)공주와 명제(明帝: 재위 58 ~ 75)의 딸들인 융려(隆慮)공주ㆍ무안(武安)공주ㆍ획가(擭嘉)공주 등이 모두 지명에서 온 공주의 봉호(封號)들이다.


공주에게 하사한 봉읍은 이름[보통명사]을 늘 탕목읍(

沐邑)이라고 불렀다

한편 공주의 남편은 모두 부마(駙馬)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관직의 이름에서 온 것으로,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황제의 사위, 곧 공주의 남편을 이 관직에 임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공주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樂浪)의 태수(太守) 최리(崔理)의 딸인 낙랑(樂浪)공주와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고구려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 ~ 590)의 딸 평강(平岡)공주,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 ~ 632)의 딸로,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의 비(妃)가 된 선화(善花)공주 등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공주라는 호칭이 고려 문종(文宗  재위1046∼1083) 때의 관제에 대장공주(大長公主)와 함께 정1품으로 책정되었으며 공양왕 때에도 왕의 딸은 공주라 불렸으나, 제도가 미비해 조선 초기까지도 왕녀·궁주(宮主)·옹주(翁主)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의미에 있어서도 왕의 적실녀(嫡室女) 뿐만 아니라 왕의 후궁을 공주라 부르기도 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비로소 공주를 내직의 호(號)와 구별하고 성종 때에 이를 제도화시켜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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