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지구를 정복하는 건 외계인이 아니라 플라스틱
나는 너의 플라스틱이다.
나는 원유로부터 나와 뜨겁게 가열된 뒤 증류탑에서 세 번째로 분리된 나프타라는 탄화수소였다가, 탄소의 결합에 의해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가, 사슬 형태의 거대한 분자구조를 갖는 중합 과정을 거쳐 너에게 왔다.
하지만 플라스틱이라고 해서 다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너는 최근에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치킨집에서 준 탄산음료 안 먹고 쟁여뒀던 걸 몽땅 꺼내 버렸다. 음료 병의 몸체는 PET, 뚜껑은 PP이다. 우리는 PVC, PET, LDPE, HDPE, PP, PS로 나뉜다. 그나마 재활용이 활발한 것은 PET와 HDPE(고밀도 폴리에틸렌)이고, LDPE(저밀도 폴리에틸렌)와 PP는 대부분이 일회용품이거나 필름류여서 회수율 자체가 높지 않다. PS는 단가가 높지 않아 재활용업체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음료 병목에서 링을 빼내는 게 힘들어 욕이 나왔는데, 라벨도 드럽게 딱 붙어서 조각조각 떨어질 때는 더한 욕을 했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잘 씻어서 말려서 일일이 분리해서 버렸으므로 운이 좋다면 다시 똑같은 PET로 재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닫힌 고리 재활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닫힌 고리'는 PET는 철저히 PET로만 재탄생되는 자원순환형 시스템이다. 막연히 너는 생각했었다. 지금 버린 플라스틱이 정말 다시 똑같은 플라스틱으로 쓰일까? 언젠가 너는 홍대 밤거리를 걷다가, 쓰레기차가 모든 재활용쓰레기를 한 봉투에 쓸어 담아, 그것들이 다 하나로 섞이는 것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해 몽롱한 중에서도 너는 여태껏 그리 잘 분리배출했던 재활용품들이 결국 저리 끝나는구나, 허탈했었다. 이제와 너는 다시 의구심이 든다. 이 사회가 정말 닫힌 고리를 지향할 마음이 있는 것일까.
알고 보면 이렇게 여러 종류인 플라스틱을 너는 한 덩어리로 모아서 배출한다. 너는 네가 읽은 책에서 그런 너의 행동을 ‘소극적 재활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라스틱류에 모든 플라스틱 몰아넣기. 재활용의 구분은 오직 종이류, 캔류, 병류, 비닐류, 플라스틱류가 전부인. 최근에야 겨우 투명한 페트병을 모으는 자루가 따로 생겼지만, 돈 되는 페트 하나만 빼고 나머지 플라스틱들은 여전히 한 자루에 담긴 채 거의 쓰레기로 버려진다. 여전한 눈가리고 아웅하기. 여전한 전시행정. 뭐 그마저도 안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겠지만.
나는 지금 너의 손에 들린 일회용 커피컵이다.
너는 내가 어떻게 너의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잠시 너의 더위와 갈증을 식혀주기만 하면 그뿐. 그런 식으로 너의 손을 거쳐 간 플라스틱은 나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다. 나의 몸체에 로고가 그려져 있으므로 나는 재활용되지 못한 채 버려진다. 그렇게 너와 나의 얼마간의 인연은 끝이 난다. 재활용 쓰레기통에 나를 잘 넣는 것으로 너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재활용품이 아닌 쓰레기일 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사회의 쓰레기 처리 시스템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제조 방식이 문제다. 그러니 개인에게 책임감과 죄책감을 전가하지 말고 정부와 기업이 먼저 나서라고, 억울한 너는 항변한다. 음. 알겠습니다.
나는 외계물질이다. 나는 잠시 너의 손에 들렸다가 빠르게 너를 떠난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한 500년 살아간다. 그때는 너도, 너와 함께 지금 이 지구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두 스러지리라.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남는다. 나는 이 지구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지구 상에 처음 나타난 플라스틱도 아직 썩지 않고 존재하는 중이다. AI와 함께 하는 편리한 미래세계, 혹은 외계인이 침공한 지구를 위해 싸우는 슈퍼히어로를 그린 SF영화를 흥미롭게 보는 너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외계인은 꼭 나처럼 생겼을 것이다. 내가 지구를 지배하리라.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