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마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주말이 껴있어서 짧다면 짧은 설 연휴, 아쉬운 마음에 연차를 몰아 쓰고 남들보다 빠르고 긴 연휴를 맞이했다. 그 덕에 기차표대란 걱정 없이 부모님 집에 왔는데, 걸려오는 집주인 전화.
"여보세요?"
"응~ XXX호 학생. 이번 설에 집에 내려가지? 낼모레부터 기온이 뚝 떨어진다네. 수도가 얼 수 있으니까 내려갈 때 물 틀어놓고 가~"
"아... 저 이미 내려왔는데요..?"
"정말? 아... 낼모레부터 한파주의보 내려서 보일러 기사양반이 수도 동파될 수 있다 그랬는데.. 어쩌지.."
"음... 그럼, 제가 비번 알려드릴 테니, 대신 물 틀어주실 수 있나요?"
"그럴래? 그럼 알려줘 봐. 내가 틀어놓을게."
"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연휴 보내세요~"
내가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참견하시는 집주인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안 했던 걱정거리 전혀 없이 설 연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온수가 안 나온다. 젠장.
"여보세요? 아주머니.. 방도 따시고, 찬물도 잘 나오는데,, 온수만 안 나와요."
"잉? 알겠어. 확인해 보고 전화 줄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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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응, 학생. 보일러 기사가 그러는데, 온수 방향으로 물을 틀었어야 했다네. 보일러 교체할 때 말했다는데, 기억나?"
"글쎄요.."
"보일러 교체할 때 말했다는데, 나는 그때 그냥 물 틀어놔라 해서 찬물로 틀었는데, 무튼 기사 온다니까, 좀만 참아줘"
"네"
.
.
.
"여보세요"
"저, 학생.. 그게.. 기사가 와도 할 게 온수보일러 녹이는 거뿐이라네? 근데 그거 하는데 60만 원 든다는데... 일단, 뜨거운 물로 수도꼭지 주변으로 뿌리고, 드라이기 열기로 온수보일러 쪽 녹여보라는데.. 좀 더 참아줄 수 있어?"
"네?"
"일단 한 번 시도해보고도 안되면 그땐 꼭 기사 부를 게!"
"아.. 네.."
그렇게,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화장실 싱크대를 번갈아가며 수도꼭지에 물을 뿌렸지만,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만 나오는 상황... 점점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져 가던 찰나.
"콸- 콸-"
"학생~ 온수보일러는 녹은 거 같은데, 물 나오는지 확인해 봐~"
"네, 오- 잘 나와요!"
"다행이네. 후"
그렇게 돌아서는 아주머니의 손엔 전기난로가 있었다. 혼자서 밖에 있는 보일러 앞에 앉아 저걸 틀고 계셨던가... 감사한 마음이 들던 찰나.
"학생, 이번 겨울이 유독 춥데. 내가 나름 신경 쓴다고 해서 물도 대신 틀어준 건데, 도움이 못됐네. 앞으로 수도세 더 나와도 추가금액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겨울 지날 때까진 수도 얼지 않게 물 팡팡 틀고, 온수 졸졸 흐르게 하고 살아~ "
라는 말에 감사함 보다는, 도움이 못됐다는 말에 동의하는 마음이 아주 잠시동안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 며칠 전에도 보일러 고장으로 몇 시간을 추위에 덜덜 떨었는데. 그때도 내가 뭐라 안 했는데.
당연히 이번 일은 집주인이 해결하는 게 맞지. 그러라고 내가 우리 집 비번까지 알려줬는데.
기사도 안 부르고, 불편해도 안 따지고, 시키는 대로 뜨거운 물 화장실 싱크대 번갈아가며 부은 노고가 있는데.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참 못난 심보라고 느꼈다.
참 못됐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다.
고마움을 고마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이기적이게도 못난 마음이 생겨난다.
더, 더, 더 바라게 된다.
우리는 당연하게 바라게 되는 순간에,
툭 튀어나오는 못난 마음을 발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오늘을 기록할 내 일기장에는
보일러 온수로 고생하던 순간의 기록보다
내 못난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이 담길 것 같다.
작심삶일 / 글: 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