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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셔스 May 28. 2024

업무 시간에 놀러 가도 되는 나라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소위 말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화이트칼라 직군이다. 주로, 하이브리드 근무(주 2-3회 출근, 나머지 날 재택근무)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하이브리드라고 해도,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회의에만 나타나면 아무도 내가 출근하지 않았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나의 출근 여부를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당연히 출근, 퇴근 카드를 찍지도 않는다.


업무 시간 후 회식도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한국에서 보면 얼마나 이상적인 얘기인가? 무제한의 자유, 월급루팡 가능!


하지만, 오히려 이 무제한의 자유가 월급루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마무시한 성과주의 때문이다.


"네가 몇 시간을 일하든, 업무 시간에 잠을 자든, 소풍을 가든 신경 쓰지 않아. 대신, 결과물을 내놔."


내 상사들은 내가 일을 열심히 안 한다고 해서, 한국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혼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들이 기대하는 결과물을 내놓지 않으면 낙오될 것이라는 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미국은 당일 해고가 가능한 나라이다. 처음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당일 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고용 보험의 나라 출신인 나에게는 공포였다. 업무에 완전히 초짜였던 나는 업무 파악 속도와 업무 처리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잘리지 않기 위해, 매 미팅마다 나의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하루 종일, 주말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재택근무 제도가 큰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성과에 대한 기대감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성 동료나 상사들의 경우,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아이들이 다 잠든 후 비로소 일을 시작한다. 그들의 이메일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서가 다반사다. 휴일에도 일하고, 아이들이 교외 활동으로 축구를 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며 노트북을 두드리며 일을 한다.


고백하건대, 미국 직장에서의 2년 동안 나의 워라밸은 완전히 무너졌다. 온전히 휴식을 취한 날이 일 년에 열흘 정도나 될까? 마치 수능을 코앞에 둔 수험생처럼 놀아도 노는 것 같지 않고 틈만 나면 노트북 앞에 앉아서 일을 했다.





출처 : ChatGPT

얼마 전, 뉴욕대학교 병원의 디렉터급 교수와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센터도 이끌어야 하고, 학생들도 지도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하고, 진료도 해야 하고, 가족과의 시간도 보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하나요?"


"그건 참 쉽지 않죠. 저도 처음에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다른 일을 생각했고, 그 일을 할 때는 또 다른 업무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한 가지 일을 할 때는, 딱 그 한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구글에서 일하는 김은주 디자이너는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직장과 연애를 하지 말고 썸을 타세요."


이 두 사람은 배경도 다르고 분야도 다르지만, 미국에서 일을 하는 그들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맺고 끊음을 확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미국 직장 생활 2년 동안, 나는 자유가 통제보다 때로는 훨씬 무서울 수 있음을 배웠다. 이 자유와 함께하는 성과주의는 미국이 세계의 최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실함'과 '개근'을 미덕으로 배우고, '눈치'를 필수품으로 장착하고 살아온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 앞에서 나는 맺고 끊음을 잘하지 못했고 일의 노예가 되었다. 이제 직장과 썸을 타는 법을 배우고, 하나를 할 때는 하나만 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미국 생활 적응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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