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없었지만 응원이 있었다

by 루비나

의도치 않게 시작한 일을 자연이 힘내라며 응원해 줄 때가 있다. 워킹홀리데이를 오고 처음으로 떠난 삿포로 여행에서 그랬다.


4박 5일의 여행 중 3일 차는 오전에 가고 싶은 카페만 정해놓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카페를 가는 길에는 목적지가 있었지만 나와서는 그냥 고개를 돌려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주변을 돌아보며 발이 이끄는 대로 가보고 싶었다. 관광지가 아닌 나무가 많아 보이는 곳으로 갔는데 숲 사이로 나무 길이 있었다. 아스팔트보다는 숲길을 좋아해서 걷는데 역시나.. 너무 좋았다. 사진도 찍다가, 길을 따라 걷다가를 반복하는데 어느 순간 나무로 만든 길이 없어지고 경사진 흙길만이 보였다. 표지판도 없던 길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편한 복장으로 위에서 내려오시는 분을 보고 그냥 올라가 봤다. 가는 길에 알 수 없는 달큰한 냄새에 홀렸는지 ‘끝까지 올라가 보자!‘하며 길을 나섰다.


나는 간헐적으로 무모할 때가 있다.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라서 인지는 못하고 살았는데, 오늘 나의 모습을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뭐가 나올지도 모르는, 심지어 의사표현을 100% 할 수 없는 외국에서 짧은 산행이 시작되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길이라 물도, 간식도, 복장도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올라가면서 마주치는 분들과 “こんにちは(곤니치와)!”하며 인사하는 것도 좋았고, 흙을 밟으며 산을 타는 것도 즐거웠다. 가는 중에 만난 하나의 표지판 덕분에 그래도 곰이 나오는 무서운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보증된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외길로 되어있어 방향을 찾을 필요는 없었지만, 20분 동안 빠르게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 조금 지쳤던 것 같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딘가에서 옅은 민트향이 났다. 그대로 멈춰 서서 호흡을 하니 진하진 않았지만 끊임없이 민트의 청량함이 코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속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맑아졌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으로 구글지도를 열었다. 아, 나 핸드폰이 있었지?


무작정 가다 보니 몰랐는데, 정상에 올라가면 도시가 잘 보인다고 해서 예전에 저장했던 곳이었다. 결국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하게 되어있었다보다. 길이 미끄러워도, 나무뿌리가 이곳저곳 튀어나와 있어 잔뜩 신경을 써야 해도, 산세를 읽을 줄 몰라도 좋았다. 크고 신기하게 생긴 나무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았고, 산을 오르며 만난 사람의 대부분이 일본인이다 보니 뭔가 그들만의 장소를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더위는 어쩔 수 없었다. 통기성이 전혀 없는 긴팔 셔츠에 숄더백, 확실히 등산을 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30분쯤 걸었을 때 결국 셔츠를 벗었다. 목이든 등이든 아주 땀범벅이었다. 그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울리는 바람 소리가 시작됐다. 타이밍도 참 영화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식혀주니 다시 힘이 났다. 그 후 올라가니 금방이었다.


그렇게 올라간 정상에서 본 도시는 신기하게 예뻤다. 내가 좋아하는 야경도 아니었는데, 하늘도 흐린 회색 빛뿐이었는데, 무채색의 건물 숲이 이렇게 예뻐 보일 수가 있나? 그 풍경을 보고 내가 웃고 있었다. 결과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행복해서 필터가 씌인걸까? 산을 올라가 보라며 유혹한 초입의 달큰한 향이, 꽃도 없었고 풀만 보고 가다가 힘든 순간 만난 상쾌한 민트 향이, 셔츠를 벗자마자 소리와 함께 찾아와 준 시원한 바람이, 수미상관 구조마냥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알려주는 듯한 초입에서 맡았던 달큰한 향을 맡고 거의 바로 정상을 맞이했는데, 그게 그래서 좋았나? 혼자 오른 산이지만 홀로 간 것 같지 않았다. 향으로 바람으로 흙의 촉감으로 수많은 응원을 받으면서 갔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눈은 산 아래를 보고 있었다. 건물들을 보는데, 영화의 도입부 마냥 까마귀가 산에서 건물 쪽으로 세차게 날아갔다. 내 눈이 카메라라면 까마귀가 가는 방향대로 줌인을 해서 영화의 등장인물이 있는 곳까지 화면을 이어갔겠지. 반대편에서는 나보다 훨씬 큰 자동차들이 새끼손톱보다 작게 보였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도시에서는 한없이 크고 높았던 건물들이 블록 장난감보다 작아지니 괜히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 위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으니 뭔가 그 도시를 내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고.. 보이는 풍경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도 재밌었다. 이번 삿포로 여행은 오늘을 위해서 왔나 보다. 우연히 만난 산이, 동산처럼 낮았어도 나에게 큰 힘을 준 소중한 산이 고마웠다. 혼자 여행을 혼자가 아니게 만들어 준 자연이 고마웠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래?



오늘처럼 가 볼래.
끝이 보일 때까지 가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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