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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Aug 13. 2021

위기의 시공간

크리스티안 페촐트, <운디네(Undine)>(2020)

시공간의 변형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연출작에서 눈에 띄는 점들 가운데 하나는 감독이 종종 특정한 시공간에 담긴 함의를 무용하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중첩해서 난민 문제를 다룬 <트랜짓>(2018)은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운디네>(2020) 역시 고전 설화 속 인물을 현대의 도시로 끌어온다는 점에서 시공간을 초월하고 역사를 압축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때 통시적 시간성이 어그러진 자리엔 개별적 주체만의 시간이 정립된다. 이는 <트랜짓>의 게오르그가 허덕이던 유령의 시간일 수도 있고, <피닉스>(2014)의 넬리가 얼굴의 상처를 지워낸 뒤 머금었던 공허의 시간일 수도 있다. 운디네가 점유하는 시공간은 현대 베를린에서 어딘가 독특한 형태로 발현된다. 역사의 흔적이 누적되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베를린은 불가해한 상황이 벌어지는 무대가 된다. 도시에 들러붙은 과거의 상흔들과 고전 설화로부터 변주를 거듭해온 정령 운디네의 사연이 결합하여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계속되는 재난 


격변의 역사를 품은 물의 도시 베를린은 예견된 재난이 실행되는 공간이다. 예견된 재난? 정확히는 운디네에게 찾아온 비극적인 운명이다. 운디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으면, 자신을 배반한 그 남자를 죽여야만 한다. 영화의 도입부, 카메라는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운디네와 요하네스 사이의 이상 기류를 포착한다. 운디네는 요하네스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눈물을 훔치며 운디네가 말한다. 날 사랑한다며 영원히, 날 떠나면 당신을 죽여야 해. 운디네의 입을 통해서 재앙의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근무 시간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하는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경고한다. 30분 뒤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떠나면 너는 죽는다고 말이다.


운디네의 시공간이 특정 계기들 혹은 연속된 사건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가공된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요하네스는 끝내 운디네의 경고를 무시하고 떠난다. 절박한 운디네는 카페로 들어가 요하네스를 찾아 헤맨다. 이때 운디네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어떤 소리가 있다. 이 소리들은 전부 물과 관련이 있거나 물로부터 나는 소리다. 어항의 기포 발생기에서 나는 소리가 운디네의 귀를 자극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운디네는 다른 곳에서 나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발을 옮긴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쫄쫄 흘러내리는 물이 개수대에 튀기는 소리다. 흥미로운 건 이 장면 이후에 운디네가 듣게 되는 물의 소리다. “운디네”. 운디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쪽은 다름 아닌 어항이 있는 곳이다. 이때 카메라는 어항 전체를 잡는 대신, 어항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잠수부 모형을 피사체로 선택하여 클로즈업한다. 신원미상의 사운드와 바로 이어지는 잠수부 모형, 운디네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무드는 운디네의 공간에 미묘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잠수부 피규어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인가, 어항 속의 물이 내게 소리친 것인가. 운디네의 혼란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재밌는 건 이런 균열의 순간들이 도통 멈추지 않고 운디네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인데, 급기야 산업잠수사 크리스토프가 그녀 앞에 등장하자마자 선반 위의 어항이 갑자기 요동치다가 유리로 된 외벽이 와장창 깨지면서 한바탕 물바다가 만들어진다. 운디네와 요하네스의 시선이 교차하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이별을 앞둔 연인의 심리를 현실적으로 담아냈지만, 카페에서의 기이한 사건들은 서사에 초현실적인 인장을 가미하여 극을 뒤흔든다. 요하네스와 이별한 직후부터 운디네의 시공간이 변화한다. 단순히 오전에서 오후로 시간이 흐르거나 근무지와 카페를 오가는 등의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고, 그녀가 머금은 시공간의 영역에 자꾸 다른 요소들이 침범하고 그녀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치는 듯한, 그러한 파열적 양상이 사운드와 편집 등의 연출을 통해 포착된다. 사실 운디네의 근무지 근처의 카페는 그녀의 일상에 스며든 공간이다. 이때 일상 공간에서 겪는 비일상적 체험은 재앙을 만들어낸다. 운디네가 직면하는 재난의 순간들, 이는 크리스토프와 함께 들어간 강과 요하네스와 시선을 교환하는 다리까지 이어진다. 본능적인 교감, 지각의 혼동, 존재적 매혹은 재난의 형상으로 찾아와 운디네의 시공간을 재단한다.                     


'운디네'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



정령의 변모, 운디네의 리액션 


운디네를 향해 강의 내용을 읊어달라고 부탁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운디네는 그에게 현대 베를린 중심에는 18세기 궁전을 본뜬 외관의 미술관이 자리한다고 말한다. 지금과 옛날이 다르지 않다는 말에는 속임수가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니까, 외관을 본뜬 궁전 형태의 미술관은 18세기의 궁전과는 명백하게 다른 건축물이다. 운디네의 말처럼 건물의 디자인이 사용 목적을 깨달을 때 도출되고, 건물의 형태는 기능을 따라서 결정된다면, 궁전 형태의 미술관은 미술관으로써의 사용 목적에 따라 새롭게 재정의된 디자인이지 옛것의 복원이 아니다. 이 교묘한 속임수, 마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의 실질적인 변천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계속해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흔적을 지워나간다. 피상적인 관점에서는 역사가 반복되면서 지금과 옛날이 같아 보일 수 있겠지만, 복원된 역사는 옛것의 껍데기를 걸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령에서 가련한 여인 혹은 인어공주나 로렐라이 등으로 변주되어온 운디네를,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며 불가해한 일을 겪는 그녀를 상실과 퇴적의 반복으로 본모습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대도시 베를린 자체로 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독일의 매체 이론가 발터 벤야민은 대도시를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역사가 충돌하는 공간으로 보았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그는 종종 유년기의 베를린을 역사·사회적 공간이 아닌 신화적 공간으로 여긴다. 도시의 곳곳에는 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현실과 꿈이 기묘한 충돌을 일으키면 무의식적으로 촉발되는 사유가 피어난다. 벤야민이 불연속적인 기억의 늪에서 유년시절 베를린의 모습을 끄집어내 회상하는 것처럼, 페촐트도 몸에 새겨진 흔적을 지워나가는 베를린을 고전 설화 속 물의 정령의 무대로 바꾼 뒤 응시한다. 이 흥미로운 시도를 통해 베를린의 도시 이미지들은 물을 매개로 설화에서 필름으로 각색된 운디네와 만난다. 물의 정령이 재소환되는 현대의 대도시에서 펼쳐지는 몇몇 조우의 순간을 거치고 나면 현대 베를린은 고전 설화의 반복이 실행되는 공간이 아닌, 변모한 주체로서의 운디네가 스며드는 공간으로 바뀐다.


운디네는 요하네스를 죽이고 물로 돌아간다. 운디네의 회귀는 설화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베를린의 강은 신화적 재현이자 반복된 역사의 장으로만 기능하는가? 하지만 이는 속임수처럼 보인다. 운디네는 예견된 재난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운명에 저항하는 몸부림만큼은 잃지 않았다. 운디네는 자신을 희생하여 크리스토프를 살려낸다. 물을 매개로 재난과 치유가 번갈아 진행된다. 요하네스의 배신은 곧 죽음을 불러오지만, 이는 반대로 크리스토프의 소생을 촉발하는 역설을 낳는다. 파멸을 향했던 비극의 주체는 소생을 시도하는 실존적 주체로 탈바꿈한다. 옛것의 복원이 비록 속임수일지라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재앙의 순간들을 향한 운디네의 리액션은 도시에 스며들은 지난날의 흔적을 다시금 꺼내볼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베를린의 역사를 응시하는 심오한 성찰이 <운디네>의 파멸과 치유를 매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운디네'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



http://www.cine-rewind.com/5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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