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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Feb 20. 2023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분명 영화는 단순한 양자 영역을 넘어선 특수한 시공간으로 인물들을 내몰았다. 시간이 힘을 잃어버리는 곳, 어떤 과학자가 무수한 평행세계의 자신 가운데 어떤 이를 콕 집어 데려다 놓은 곳. 갈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미지의 영역을 시각화하는 데 있어 영화는 어떤 고민을 늘어놓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달라 보일지, 어떻게 하면 고유성을 획득할지 고뇌에 빠져 있긴 한 걸까? 어쩐지 영화는 그런 지점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시간 순행의 매체인 영화에서 시공간을 무화하는 일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멀티버스 사가'는 왜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아메리카 차베즈가 차원을 넘나드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들처럼 소위 "멀티버스를 넘나들 때"나 이 영화에서 "양자 영역 그 아득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나, 동시대 혹은 과거의 영화들 가운데 발 딛고 선 세상과 "다른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아낸 수많은 콘텐츠들 속의 묘사를 떠올려 본다면 인간의 상상력은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엔 오리지널리티는 없다. 시빌 워 당시 크기를 과하게 늘렸던 앤트맨은 다시 한번 그 모습의 변주를 선사할 뿐이지 않나. 게다가 이곳의 무대는 어디선가 봐왔던 요소들이 적절히 뒤섞이고 배합되다가 문득 어긋나기도 하면서 피어나는 하모니와 불협화음 그 사이 어딘가의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스페이스오페라인지 디스토피아인지 투박한 장르 용어 몇 마디로 정리될 수 없게 교묘히 재편해놓은 이 무대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자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창작자들이 고군분투했다는 점은 확실히 알겠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알다가도 모를 미지의 영역'이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CG 처리라든가, 과도한 오마주라든가 하는 돌출부가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CG 요소가 제 역할을 못하고 관객의 몰입도를 떨어뜨릴 때 영화 속 내부 세계는 그 존재의 성립 여부가 흔들리게 된다. 그렇다면 고유함을 덜어낸 자리가 무엇으로 채워진 걸까. 공교롭게도 이 세계가 존립할 수 있겠느냐는 어떤 확률에 기댄 물음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까 스캇과 캉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저곳이 정말 스크린 내부에서 오롯이 존립할 수 있겠느냐(세계의 존재 가능성)는 의문, 캉의 수많은 변종들 중 하나가 하필이면 스캇과 맞닥뜨릴 수 있겠느냐는 의문 따위의 것들 말이다.


불완전한 상상력이 불친절하게 삐죽삐죽 튀어나온 영화의 무대가 그 세계관 자체의 존립 여부가 의심받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확률의 가시화, 즉 가능성만을 믿고 행동을 불사하는 인물들, 확신과 주저함 그 사이 어딘가를 맴도는 마음들, 무수히 갈라져 나가는 내 선택의 궤적들 따위의 것들이 존재감을 획득하는 건 아닐까? 결과는 정해지지 않았고 정착지도 불분명하다. 할 수 있는 건, 일단 손에서 떠나보내는 일이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그렇게 창작자의, 업계의, 원작 코믹스의 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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