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플레 Jan 15. 2023

블루베리 파이의 한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 2007)

왕가위의 영향력을 느끼는 일은 2023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9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영화가 2020년대에 다시 국내에 스며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20여년 전 극장에서 왕가위의 스타일에 충격을 받았던 젊은이들은 나이가 지긋한 기성세대가 됐다. 이들이 자식뻘 되는 젊은이들과 한 극장에서 조우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왕가위의 영화로 세대 간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7) 만큼은 그의 영화 중 가장 관심도가 떨어지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왜 그럴까. 영화에 스며든 물리적인 좌표의 문제라면, 왕가위가 홍콩을 벗어나 찍은 <해피투게더>와 <동사서독>을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만의 묘한 이질감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유독 낯선 질감을 환기한다. 이때 재밌는 건 이 영화가 다른 왕가위 영화들과 상당히 많은 지점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다. 왕가위는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매개물(유리창 등)을 두고 인물을 클로즈업하다가 갑자기 장면을 넘겨버린다. 스텝프린팅으로 흔들리는 인물의 모습을 담아내는 시도 역시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일관된 방식이다. 인물들은 항상 실연당하고, 답답할 정도로 미련을 못 버린다. 늘 추억 혹은 회상을 위한 매개체를 한 번 이상은 감각해야 하고, 누군가(이를테면 아버지)를 떠올리거나, 방황 끝에 재회하거나 다시 이어진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다리우스 콘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왕가위의 디렉팅 기조가 달라지진 않는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들에겐 <아비정전>부터 <2046>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인물상이 적절히 배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영화 곳곳에 소위 말하는 왕가위의 스타일을 들이밀 때, 어긋나거나 어색하게 끼워 맞춘 지점을 딱히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까? 왕가위는 그의 작품 속에서 촬영 방식에 변화를 주거나 삽입곡과 색감 배치 등을 통해 관념의 영역에 놓인 다양한 감정 요소들을 매만져 왔는데, <중경삼림>의 파인애플 통조림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블루베리 파이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다는 점을 새삼 짚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중경삼림> 등의 작품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할 때, 인물과 인물 사이에 놓인 매개물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경삼림>의 구두와 삐삐는 경찰 223과 마약 밀매상의 관계를 지시하는 물건들이 아니다. 서로 쌓아가는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지시하는 물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223이 구두를 통해 느끼는 속마음이 밀매상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223이 방을 떠난 뒤 다음 숏에 찍힌 밀매상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 숏에 담긴 그는 223이 구두를 벗겨주고 나서 정성스레 닦아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 직전 숏과 그 숏 사이의 시간 간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순간이 223이 떠난 뒤 1분 뒤였을 수도, 그가 떠나자마자였을 수도, 그가 떠난 뒤 30분이 흐른 뒤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중경삼림>을 통해 명확해지는 건, 관계를 형성하는 작업이 바로 확신이 아닌 가능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구두를 그 사람이 닦아주고 갔겠지, 라는 직감과 추측으로 둘러 싸인 어떤 기대감과 가능성이 혼재된 상태가 그들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더 중요한 건 사실 그 사람이 구두를 닦고 가지 않았어도 상관은 없다는 점이다.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에 대한 답례 혹은 반응을 어떻게 보일지는 또 오롯이 자신만의 선택과 판단이 작용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경삼림>에서는 인물들의 물리적, 심리적 상태를 특정 방향과 결로 굳이 끌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에 대한 태도를 서로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관계가 형성되거나 와해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선 열쇠와 파이에서 출발한 인물들의 도착점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주인공은 심경의 변화를 겪고, 주변 환경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자신의 내면에도 다시 귀를 기울인 뒤 정해진 경로에 따라 움직인다. 그로 인해 제레미와 엘리자베스가 처음 만날 때 열쇠와 블루베리 파이로 나눴던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언급되면서 매듭이 지어져야 한다. 그래서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정형화된 성장 드라마이자 로드무비 구성에 충실한 구성을 따르게 된다.


이때 <중경삼림>의 2부를 거울삼아 만들어낸 것 같은 이 영화에서, 패스트푸드점에서 663이 사 갔던 음식이 제레미의 카페에서 파는 음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중경삼림>이 연상된다고 해서, 두 영화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지는 않은 느낌이다. 내게 두 영화는 너무나도 달라 보인다. 경찰 663과 페이 사이에 울려퍼지는 음악 ‘California Dreamin’ 역시 인물들의 감정이 투영되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 사이를 들여다봤을 때 꼭 CD를 함께 듣지 않아도, 음악이 언제든 다른 곡으로 대체돼도 전혀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상징물들은 그들이 쌓아가는 관계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과정과 묘하게 비껴선 채로 관객들과 만난다.


하지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스며든 것들은 그렇지 않다. 블루베리 파이와 열쇠 꾸러미, 외상 계산서 등의 매개물이 어쩐지 지난날의 왕가위 영화 속의 그것들보다는, 표상하거나 지시하는  바에 다소 속박되지 않았나 싶다. 메인 디쉬에 가려진 채, 다소 애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블루베리 파이에 계속해서 결이 정해져 있는 상징들이 들러붙는다. 가게를 마감한 뒤 실연당한 여자와 폐기 처리되기 직전의 음식을 나눠 먹는 외로운 남자 따위의 요소들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도입부부터 블루베리 파이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드는 이미지 자체를 들이밀고 있었다. 블루베리 파이가 아닌 애플파이나 피칸 파이였다면, 과연 이 영화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애플파이를 많이 찾았다면? 제레미와 엘리자베스는 음식을 나눠 먹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블루베리 파이는 반드시 남녀 간의 애틋한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 매개물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언젠가 다시 영화를 꺼내들었을 때, 감미로운 재즈 선율과 블루베리 파이의 맛을 상상하는 순간에서 벗어나 엘리자베스와 제레미의 관계를 더 음미할 수 있는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P.S. 사실 블루베리파이를 엄청 좋아하기 때문에 글 쓰면서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에 서린 비극의 기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