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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Feb 22. 2022

‘말’에 서린 비극의 기운

<카운슬러(The Counselor)> (리들리 스콧, 2013)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카운슬러>(2013) 속 인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이곳에는 막연한 희망이나 반전의 가능성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구렁텅이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느낀다는 사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순간적으로 스치는 본능은 거짓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내게 당도할 비극이 어떤 건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을 관객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말’의 영화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면, <카운슬러>가 ‘말’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대사가 많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카운슬러>가 시종 시나리오 속 다량의 대화를 소화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응시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둘째로, 영화가 매번 말(발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롯이 연결되는 단서나 서사 전개의 분위기 같은 것들은 모두 인물들의 말속의 정보에 빚지고 있다. 이때 <카운슬러>의 대사들이 불필요한 요소가 절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가령 어떤 영화에선 인물의 심리 상태를 직접 서술하는 독백이나 내레이션/보이스 오버가 관객의 몰입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대서사를 다루는 영화(흔히 방대한 분량의 원작 소설이 있는 경우)에서 경제성(러닝 타임의 분배 등)을 핑계로 사건을 압축해서 제시하기 위해 대사 몇 마디로 요약하는 얄팍한 연출이 적용될 때가 있기도 하다. <카운슬러>는 이것들과 완벽히 부합할 수 없는 사례라는 점에서, 관객에게 독특한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인물들이 내뱉는 말에 실린 감정과 생각이 스크린 내부와 관객의 감상 환경 그 사이 어딘가의 경유지를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들이 어떤 형태로 감상자의 내면을 두드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 속 인물의 발화는 특정 상태를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예언이나 계시 행위처럼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웨스트레이가 마약 비즈니스 업계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카운슬러에게 조언하는 상황. 웨스트레이는 카운슬러의 결심이 확고하게 섰는지 재차 확인하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회유하는 식으로 진지한 경고를 반복한다. 마치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강박적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과연 여기서 웨스트레이가 카운슬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내면에 접속하여 읽어낼 수 있을까? 어쩐지 카메라는 인물의 정서가 관객의 내면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돕지 않는다. 대화 장면은 인물의 얼굴이 프레임을 적절히 메우고 있긴 하지만 상당히 건조하고 무심한 뉘앙스로 찍혔고, 대화 신을 이루는 숏들을 살펴보아도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신의 구성 요소들은 그저 인물들이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만을 드러내고 지시한다. 그 외에 다른 편집술도 특별히 동원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물의 발화가 예언이나 암시처럼 가동된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실제로 종국에 이르렀을 때 카운슬러에 관한 웨스트레이의 발언이 모두 실현되긴 해도,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영화 자체가 다양한 인물의 발화를 정서적 심화의 매개체로 활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을 염두에 둔 채 영화를 따라가야 할 것 같다. 발화 상황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발화 상황을 매번 면밀히 담아내는 데에 집중하는 영화다. 대화 신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이런 기묘한 방식을 고수하는 <카운슬러>는 어쩐지 인물들의 말 자체에 서려 있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영화 같다.




비극의 감각


후반부의 카운슬러와 동료가 전화하는 장면, 이 남자는 현학적으로 들릴 법한 연설을 펼쳐놓으면서 계몽과 훈계를 오가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카운슬러가 자신의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의 안일한 편견 같은 것들을 철저히 해체하고자 한다. 남자는 카운슬러의 마음을 보듬어 줄 생각이 없다. 교차로에 서 있다고 해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냉정한 한 마디에 카운슬러는 내심 당황하지만, 역시 당황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납치된 연인 로라의 행방을 추적하려는 카운슬러에게 아직은 비극이 당도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발언이 곧 다가올 비극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단정 짓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이 전화가 이행되는 시점에선, 로라가 처한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므로, 사건 발생 시간의 선후 관계를 따지는 작업이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시점이 포개졌을 때, 예정된 비극은 이미 일어난 비극이 되고, 실시간으로 닥쳐오는 혼재된 비극의 감각은 선형적인 시간의 논리마저 거부한 채 인물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다.


시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이 되면, 삶에서 순차적으로 맞닥뜨리는 필연-우연 간의 층위마저도 모호해진다. 사실 카운슬러의 삶에 필연이 작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삶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나. 그래서 라이너와 웨스트레이의 경고를 무시한 채 새로운 비즈니스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카운슬러는 자신이 의지하던 우연의 연쇄로 인해 파멸한다. 아주 우연히 범죄계 거물의 국선변호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우연히 그 아들인 바이커의 벌금을 내줬는데 그가 살해당한 마약 운반책이었다는 이유로, 카운슬러의 삶은 필연과도 같은 우연의 사슬로 얽매이고 만다.


운명을 멀리하던 자가 필연의 굴레를 뼈저리게 체득하게 되는 상황. 어쩌면 <카운슬러>는 인생의 불가해함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지,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매만지면서 다시금 환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카운슬러>가 너무나도 섬뜩하게 느껴지는 원인은, 웨스트레이의 경동맥을 끊어버린 특수 합금 케이블에 있지도 않고, 라이너의 시체에 접근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명품 구두를 벗기는 아이들의 모습에 있지도 않고, 청부 살인과 총기 범죄가 일상처럼 용인되는 비즈니스 불문율에 있지도 않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가운데 지금 무언가 나를 급습하려는 기운이 느껴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처절한 무력감이 영화를 섬뜩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네 삶을 우리가 절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말이다.




카운슬러에게 배달된 소포 속엔 CD 한 장이 있다. 관객은 이 CD가 차마 재생할 수 없는 스너프 영상이라는 사실을 안다. 영화가 이 대목에서 굳이 첨언하지 않아도, 웨스트레이의 예언적 발언 가운데 스너프 필름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휘발되어 버린 줄 알았던 웨스트레이의 경고 몇 마디가, 지금 이 자리에 마침내 물리 매체로 변환된 채 남자에게 실감되는 순간, 카운슬러와 관객 모두 얼어붙어 버리는 것 말고 달리 내세울 수 있는 리액션은 없다. 계속해서 경고성 발화를 ‘들어왔던’ 카운슬러가 마침내 아무것도 듣지 않고도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실감될 수 없었던 ‘발화’가 마침내 감각 가능한 실체로 바뀐 뒤 인물에게 도달하는 때가 오면, 관객은 이번에도 인물의 정서를 헤아리는 작업에 쉽사리 몰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허용된 건, 마침내 실행된 예언의 현장의 참담함에 사로잡힌 채로 압도당하는 경험뿐이다.


웨스트레이가 카운슬러에게 던졌던 농담이 있었다. 멕시코엔 현자와 처녀가 없으므로, 예수는 멕시코에서 태어날 수 없었다는 말. 이 말은 카운슬러가 발을 들이려는 세계와 맞닿은 안내문이자 동시에 섬뜩한 예언이며 암시이기도 하다. <카운슬러>의 ‘말’은 영화를 지배하는 힘이자 법칙이고 논리다. 끝내 살아남은 말키나의 뼈 있는 말 몇 마디 속엔, 카운슬러와 웨스트레이 그리고 라이너가 직면한(혹은 직면하는 혹은 직면하게 될) 운명이 서려 있다. 그래서 <카운슬러>의 프레임 내부를 채우는 인물의 얼굴이나 몸짓에서 유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극단으로 치닫는 정념이 아니라, 발화로써 선명하게 현현되고야 마는 비극의 감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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