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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Jan 09. 2022

얼굴의 만남, 얼굴의 마법

<쁘띠 마망(Petite Maman)> (셀린 시아마, 2021)

스포일러 있습니다.




넬리는 부모님과 함께 할머니의 유품 정리를 위해 엄마가 살았던 고향 집으로 향한다. 집 근처의 숲에서 넬리는 동갑내기 엄마 마리옹을 만난다. 넬리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 마리옹과 시간을 보낸다. 이때 타임 슬립의 성사 여부나 시공간 초월의 가능성은 그다지 쓸모없는 쟁점으로 전락해버린다. 오히려 <쁘띠 마망>(2021)을 보는 관객들의 눈과 귀에 들어차는 것들은, 오두막 자재로 쓸 나뭇가지를 함께 옮기는 아이들의 꼬물거리는 움직임이라든가 함께 요리할 때 까르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다. 우리는 정신을 곤두세운 채 영화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아이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문득 두 아이의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수준을 넘어 거의 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생각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연출을 맡은 셀린 시아마가 일란성 쌍둥이 자매인 조세핀 산스와 가브리엘 산스를 각각 넬리와 마리옹 역에 캐스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일란성 쌍둥이인가. 가브리엘이 아닌 다른 배우를 캐스팅해서 그의 얼굴을 조세핀의 얼굴로(혹은 조세핀과 최대한 비슷해 보이는 얼굴로) 바꾸는 그래픽 처리 기술을 도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어째서 똑 닮은 두 아이가 각각 딸 넬리와 엄마 마리옹으로 분화되어야만 한 걸까.




얼굴을 상상하려면


넬리가 어린 시절의 마리옹을 처음 목격하는 장면. 자신의 신장보다 몇 배는 긴 나뭇가지를 낑낑대며 옮기는 한 아이가 보인다. 빨간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 아이는 넬리를 보더니 손을 흔들어 도움을 요청한다. 넬리가 소녀와 함께 나무를 옮겨다 놓은 자리엔 크고 작은 나뭇가지를 쌓고 덧대서 만든 아담한 오두막 한 채가 서 있다. 이 오두막은 엄마가 말했던 그 오두막이다. 엄마는 이전에 넬리에게 집 주변 숲에 가서 오두막을 짓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넬리는 오두막 주인의 집으로 간다. 재밌게도 넬리에게 있어 마리옹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전혀 낯설지 않다. 넬리는 이 집이 할머니의 유품 정리를 위해 잠시 머무르고 있는 집과 똑같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 뒤, 소녀의 방에 있던 노트에선 엄마의 이름을 발견하고, 할머니가 사라진 침대에 다른 누군가가 버젓이 누워 있는 모습까지 목격한다. 이렇듯 우연히 만난 아이가 어린 시절의 엄마라는 사실을 넬리가 서서히 깨달아가는 과정은 기존에 알고 있던 단서들을 조합하는 과정에 묶여 있다.


이때 <쁘띠 마망>에서는 마리옹의 얼굴이 넬리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만남의 첫 순간을 특별하게 가공하는 지점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넬리가 자신이 만난 아이가 마리옹임을 파악하려 들 때, 아이의 얼굴이 자신의 외모와 비슷하다는 점을 동원하는 장면도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얼굴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 누굴 닮았는지 관심이 없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두 아이의 만남이 본격화된 이후 상황에 개입되는 인물은 단 두 명, 넬리의 아빠와 어린 마리옹의 엄마(넬리에게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다. 두 사람은 각각 모종의 계기로 넬리와 마리옹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시종 두 아이를 각각 다른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넬리와 마리옹의 생김새는 명백히 다르게 감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쌍둥이 캐스팅이라는 설정 요소는 디제시스 영역보다도 스크린 바깥과 적극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넬리가 만나는 어린 시절의 엄마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걸까. 아이가 상상하는 엄마의 어릴 적 얼굴은 어쩌면 아이 자신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넬리는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을 먼지 쌓인 앨범 속 사진 몇 장 따위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식해오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넬리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엄마는 가깝지만 낯선 존재다. 이에 관해서는 넬리와 엄마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것으로부터 운을 뗄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쁘띠 마망>은 사랑과 위로에 관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서사적 동인이 상실감 같은 것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간식거리를 건네주는 딸과 그것을 받아먹는 엄마의 모습. 이런 소소한 일상의 순간을 곁들이는 <쁘띠 마망>은 순식간에 인물 각자의 심연을 건드린다. 집에 도착한 뒤 넬리가 엄마의 얼굴을 손전등으로 비출 때, 관객을 붙드는 마리옹의 우울하고 공허한 표정이 포착된다. 따라서 우리는 <쁘띠 마망>의 마법 같은 만남을 음미하기 전에, 인물 관계에 들러붙은 스산한 기운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과자를 선뜻 건넸던 넬리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려고 한다. 넬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았던 방은 어디였는가? 바로 엄마가 살던 방이다. 물론 엄마를 향한 딸의 관심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지만, 할머니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라든가 주방이나 거실 등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엄마가 지냈던 공간에 관심을 드러내는 넬리의 모습에선, 엄마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염원이 느껴진다. 넬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엄마를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우울감에 사로잡힌 엄마를 향해 넬리는 여기가 싫냐고 슬쩍 물어보는데, 엄마는 넬리에게 항상 잘 때가 되면 질문을 한다는 식으로 맞받아치며 얼버무린다. 그러자 넬리는 잘 때가 되어서야 엄마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뼈 있는 표현으로 응수한다. 여기서 다른 건 몰라도 두 사람이 평소에 매우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다. 엄마는 어쩐지 넬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넬리가 엄마의 오두막에 관해서 물어볼 때도, 마리옹은 넬리가 만족할 만큼 상세히 그 시절의 기억을 펼쳐놓지 않는다. 그래서 넬리가 어린 시절의 마리옹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모녀 관계의 개선 여부와도 은밀하게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사실 관객이 나중에야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마리옹은 스물세 살에 넬리를 낳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어야 하는 마리옹의 심적 부담감이나 당장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현실적인 고충 같은 것들이 모녀 관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만 같다. 물론 영화는 그에 관한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고 괄호로 남겨둔다. 과연 마리옹이 넬리를 온전히 품을 수 있었을까? 그런 맥락에서 넬리 역시 엄마의 내면에 자리한 은밀한 것들에 다가가기 힘들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심리적 거리감이 생성된다. 그리고 끝내 마리옹이 넬리로부터 잠시 멀어지고야 만다. 물리적으로도 거리가 벌어지면서 넬리는 현시점의 마리옹과 잠깐의 이별을 경험한다. 그래서 마리옹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대체하는 동갑내기 여덟 살 마리옹의 얼굴에는 넬리의 복잡한 심경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쁘띠 마망>에서 굳게 걸어 잠긴 것 같은 엄마의 마음속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딸의 얼굴이 과연 어떤 얼굴을 만나고 있는가.




만남의 확장


<쁘띠 마망>은 만남에 관한 영화다. 만남의 순간,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변화가 있다면 바로 거리감과 직결된다. 이 거리감은 마음과 마음 사이를 가늠해 보는 데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물리적인 좌표가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를 파악해 보는 것으로부터도 산출될 수 있다. <쁘띠 마망>은 인물들이 물리적·심리적으로 가까워지려는 순간을 조명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대면과 접촉이 특히나 유효하다. 물론 시아마의 영화가 지금껏 인물 간의 만남에서 촉발되는 사건을 응시해왔기 때문에, <쁘띠 마망> 역시 이 논의의 자장에 머무를 땐 그다지 새로운 쟁점을 환기하고 있지 않다. 다만 <쁘띠 마망>은 대놓고 SF 혹은 판타지 요소가 반영된 마법 같은 설정을 골조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아마가 그간 내놓은 영화들과 사뭇 다른 인상을 풍기는데, 이때 시아마가 현실감을 덜어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 넣으려고 하는지 살펴보고 싶다.


이때 넬리와 마리옹의 신비한 만남이 사실 두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의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넬리의 할머니이자 마리옹의 엄마라는 한 인간 존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쁘띠 마망>은 당연하게도 ‘엄마’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작은 엄마(쁘띠 마망: Petite Maman)’를 만나는 넬리의 이야기가 물론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제목을 경유한다면, 작은 마리옹과 그의 엄마(넬리의 할머니) 사이의 관계 또한 조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넬리를 중심축으로 하는 어린 마리옹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물론, 어린 마리옹과 현시점의 마리옹을 주체로 하는 경우의 사연 또한 반드시 짚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니 필요하다기보단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세대에 걸친 모녀 관계를 조명하는 각각의 작업이 하나라도 이행될 수 없다면, <쁘띠 마망>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린다. 관객이 알 수 있는 사실은, 할머니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뿐이고, 그에 따라 영화는 할머니의 빈자리를 감각하는 손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할머니의 임종 상황에 직면한 넬리가 당시에 느꼈던 감정은 소거된 상태로 영화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넬리가 앞으로 겪을 일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맞닿아 있기도 하며, 감독 역시 이를 위해 인물들에게 사려 깊은 시선을 보낸다. 도입부에 환기했던 지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시아마는 흩뜨려 있던 감정의 파편들을 수거한 뒤 그 틈을 봉합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딸이 엄마와 할머니를 마주하고, 엄마가 엄마와 딸을 마주하고, 할머니가 딸과 손녀를 마주하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넬리는 상실감에 매몰된 엄마를 보면서 함께 심란해한다. 이때 모녀의 심리 기저에는 한 사람의 부재가 영향을 분명히 미친다. 마리옹에게는 엄마, 넬리에게는 할머니가 소거된 자리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넬리는 돌아가신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며 찝찝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은 조금 더 복잡한데, 사실 엄마는 묵직하게 내면에 들러붙는 감정의 덩어리들을 어린 딸에게 마냥 털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쁘띠 마망>에선 엄마가 미처 꺼내놓지 못한 것들을 딸이 찾아낸다. 그에 따라 젊었을 적의 외할머니는 넬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득 회상에 잠기게 된다. 바로 자신의 엄마(넬리에겐 증조 할머니)의 이름이 넬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마법 같은 만남의 순간들이 중첩되는 와중에, <쁘띠 마망>은 세 명의 인물이 각자의 어머니와 접속되는 일을 명확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참 오랜만에 그 이름(넬리)을 불러본다는 말을 자신의 손녀 넬리에게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넬리가 숲에서 소녀를 만나기 전에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넬리는 엄마에게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영영 이별해버린 것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마리옹은 넬리한테 할머니와 어떻게 작별하고 싶었냐고 묻는다. 넬리는 ‘Au Revoir(프랑스어: 안녕, 잘 가요, 또 봐요)’라고 답하고, 마리옹도 똑같이 인사한다. 정확히 이 시점, 이 인사말을 교환한 이후 영화에서 마리옹은 마치 인사를 괜히 나눈 게 아니라는 듯 잠시 소거된다. 이때 사라진 엄마 마리옹의 자리를 젊은 할머니가 대체한다. 넬리가 할머니에게 넥타이 매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엷은 미소와 함께 넥타이를 매어준다. 그리고 할머니는 제쳐두었던 단어 퍼즐에 다시 몰두하고, 넬리는 잡지의 퍼즐을 가만히 살핀다. 넬리가 문제 하나를 풀어 할머니에게 귀띔해 주면 할머니는 넬리에게 퍼즐을 잘 푼다며 칭찬을 건넨다. 넥타이와 잡지, 대화 그리고 시선의 교환. 이 영화가 요양원의 어떤 할머니와 넬리가 단어 퍼즐을 푸는 모습으로 시작했던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이 만남의 순간이 넬리에게 얼마나 소중할지 나로서는 감히 가늠이 가지 않는다.




같은 얼굴로 만나는


이 지점에서 문득 <쁘띠 마망> 속 마법 같은 캐스팅의 위력을 다시 느낀다. 우선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넬리와 마리옹을 정확히 구별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다. 앞서 살펴보았듯 관객만이 이 두 소녀의 외형적 유사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할머니는 넬리를 아주 명백하게 타인으로, 즉 마리옹의 동네 친구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때 관객에게 할머니와 넬리를 담는 투 숏이 제시될 때마다 관객은 ‘마리옹의 엄마-마리옹’을 대체하는 ‘할머니-넬리’라는 관계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산스 자매의 생김새가 유사하다는 것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넬리를 주체로 뒀을 때는 마리옹(현시점의 엄마)의 빈자리가 과거의 젊은 할머니로 대체되는 구조로 짜여 있다. 즉 엄마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넬리가 다시 한번 소통의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이때 무게추를 할머니와 그의 딸 마리옹으로 옮긴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실 영화를 통해 암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마리옹 역시(마리옹-넬리의 관계처럼) 자신의 엄마와 엄청 가까웠던 사이는 아닌 것처럼 묘사된다. 그런 점에서 인물 관계의 변주는 쌍둥이 캐스팅으로 인해 ‘할머니-넬리’ 구도가 다시 한번 할머니와 그의 딸인 마리옹으로, 즉 ‘엄마-딸’의 관계로 치환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의 연쇄 작용은 세대를 걸친 모녀 관계에 있어서 발현되는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담기는 장면들은 ‘엄마의 이미지- 딸의 이미지’로 한 차원 일반화를 거친 추상적인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만드는 관념적인 유기성은 대를 잇는 모녀의 만남을 편집이나 연출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에서 형상화한다. 본래 엄마와 딸의 관계라는 것은 아버지-자식 관계와는 그 근간이 다른데, 제 몸으로 아이를 낳음으로써 이어지는 결속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쌍둥이 캐스팅은 어머니의 핏줄로 지속되는 관계 유지를 영화 언어로 녹여내는 방식이다.


사실 전술했듯 어린 마리옹의 얼굴이 넬리와 닮았다는 사실을 논할 때, 넬리의 무의식이 빚어낸 허구적인 요소에만 가둔 채 <쁘띠 마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접근이 훨씬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이건 넬리의 경험 자체가 팀 버튼 영화 속의 앨리스가 무의식의 영역에서 원더랜드를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두 소녀의 외형적 유사성은 넬리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객의 인식 체계를 건드리는 마법을 선사하기 위해 도입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영화에서 넬리와 마리옹 배역을 쌍둥이가 맡았다는 사실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영화는 일란성 쌍둥이 캐스팅이라는 ‘얼굴의 마법’을 통해 세대에 걸친 엄마와 딸들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감각적인 도식으로 매만진다.


따라서 얼굴과 얼굴, 몸과 몸,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쁘띠 마망>에선 반드시 인물들이 다시 마주하여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 여정을 끝마친 넬리가 ‘마망’ 대신 ‘마리옹’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등장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사라졌다가 다시 현현한 마리옹도 ‘넬리’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에 앞서 잊지 않고 넬리와 할머니, 넬리와 어린 마리옹의 만남 또한 매듭짓는 시간을 담아내기도 했다. 마리옹의 수술을 위해 떠나는 차량 옆에서 할머니와 넬리가 ‘Au Revoir’를 교환하는 장면이 있었고, 두 아이가 말없이 포옹하는 모습을 담아낸 숏이 있었다. 이때 할머니가 ‘Au Revoir’라고 답하며 넬리의 볼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댈 때의 촉각적인 질감이나 두 사람의 포옹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만남 자체에 매달려 온 <쁘띠 마망>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관객의 마음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넬리와 할머니의 투 숏에서 관객은 오프닝 때 불쑥 등장했던 침대의 빈자리를 떠올리면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기도 하다. 할머니의 육체가 사라진 침대로부터 나온 죽음의 기운이 딸과 손녀의 내면에 스며든 채 시작했던 <쁘띠 마망>에서 인물들은 어쩌면 ‘Au Revoir’에 담긴 또 보자는 속뜻처럼, 언제든 마법 같은 만남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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