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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플레 Dec 27. 2021

윤리 실험이 되려는 광기의 무대

<소년 아메드> (장 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2019)

스포일러 있습니다.





다르덴 형제(이하 ‘다르덴’)의 <소년 아메드>(2019)에는 주변인을 향한 소년 광신도의 폭력이 짙게 배어있다. 영화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 소년에게 주목한다. 이름을 새겨 넣은 영화의 제목처럼 다르덴이 ‘소년 아메드’에 집중할 생각이었다면, 그의 행적과 결부된 정황 및 배경을 관객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자국 벨기에의 관객과 유럽 유수의 영화제를 찾는 관객뿐만 아니라 비유럽권 관객들 모두가 전통 이슬람과 변질된 이슬람 급진주의 간의 차이점을 정확히 간파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덴의 관심사는 다른 측면에 있는 듯하다. 그들은 종교적 맹신이 현실에 스며든 맥락을 소거한 채 소년의 광기를 나열하는 데 열중한다. 그들은 다수의 인터뷰에서 소년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발화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교란과 위장의 징후가 내게 손짓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르덴 영화에서 인물 간의 갈등은 가족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의 해체 및 재구성은 언제나 그들이 던졌던 화두를 지탱하는 핵심 모티프다. 그런데 <소년 아메드> 속 광기의 재현은 그런 요소들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한다. 물론 <소년 아메드>에서도 역시 가족 문제를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의 근간에는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래서 배교자로 취급받는 아버지의 부재, 세속화된 삶에 익숙해진 엄마와 이맘(지도자)에게 세뇌된 자녀의 갈등이 얽힌 기형적 가족 구성에만 집중한 논의로는 <소년 아메드>를 오롯이 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소년 아메드>는 가족 테마에서 슬쩍 벗어난 듯한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이나 <언노운 걸>(2016)과 유사한 층위로 공유될 수 있을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아 보여 난감하다. 인물을 따라가는 방식에서 세 영화는 공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년 아메드>에서 다르덴이 어떤 논조를 채택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소년 아메드>가 공개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생성된 반응들이 그다지 다채롭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를 향한 비판이나 반문 또한 소수에 불과하다. 뜨뜻미지근한 담론들이 드문드문 전개되어왔을 뿐이다. <소년 아메드>는 다르덴의 초창기 영화를 뛰어넘는 걸작으로 평가받지도 않고, 정반대로 노감독의 문제작 취급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 다르덴은 자신들의 영화적 고집을 지켰을까. 우리는 과연 <소년 아메드>가 변화를 거듭하는 다르덴의 또 다른 윤리극이자, 그들 세계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카메라의 양가성


도입부에서 소년이 계단을 황급히 올라가는 장면 이후엔, 곧바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아메드의 모습이 나온다. 첫 숏의 카메라는 계단 아래에 머무른 채 멀어지는 소년을 바라만 보다가, 다음 숏에선 순식간에 그의 얼굴 옆에 가까이 붙는다. 이때 첫 숏은 아메드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고, 감독도 카메라도 관객도 그와 동화될 수 없다는 영화의 무력감을 표출하는 고백일까? 하지만 의구심이 생긴다. 과연 카메라가 그의 행동을 놓쳐버린다고 확언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두 번째 숏이 중요하다. 아메드가 통화하는 모습을 포착하기 이전에 촬영자가 화장실 안에서 아메드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사실 말이다. 섣부른 의구심일까? 얼핏 보기에 카메라의 권능을 포기한 듯 보이는 <소년 아메드>가 사실은 인물의 동선을 지배하는 권위를 은근슬쩍 드러내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즉, <소년 아메드>는 카메라가 소년에 앞서 그가 향하거나 향할 곳에 자리하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피사체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좌표 설정보다는 인물의 액션과 리액션 그 자체를 조망하는 시선만이 강조된다.


이 지점에서 잠시 최근의 다르덴 영화로 우회할 필요가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롱테이크로 출발한다. 숏 말미에 계단을 올라가는 산드라를 따라가지 않고 컷하는 방식은 <소년 아메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숏은 <소년 아메드>와 분명하게 다르다. 카메라는 산드라가 있는 화장실에 미리 들어가 있지 않고 바깥에서 그녀를 응시한다. <언노운 걸> 역시 <소년 아메드>와 다르다. 첫 롱테이크 숏에서 제니가 진료실을 벗어나면 다음 숏의 카메라는 제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두 편의 영화와는 다르게, <소년 아메드>는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년을 공간 내부에서 목격한다. 이는 특정 장소에 있던 카메라가 동일 공간을 점유하던 인물의 운동을 응시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인물이 프레임 안으로 편입되는 순간을 같은 장소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메라가 목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카메라의 위치는 곧 인물의 동선 문제와 결부된다. 카메라는 인물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카메라가 인물과 관객 사이를 유영하는 매개자로 기능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관객에 앞서 존재하면서 인물의 상황을 제어하려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열한 쟁점들은 프레임 내부에 피사체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의 문제, 그러니까 시각 정보 전달의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가 아니다. 단지 다르덴 영화에서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 운용과 그에 따른 시선이나 시점의 문제가 그 자체로 형식과 테마로 직결되는 영화적인 핵심 동인이었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에 시작된 고민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가장 파급력이 큰 구간 가운데 하나인 소년의 추락 역시 점검해야 한다. 소년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은폐한 카메라는 권한을 사용한 것뿐이지 시점의 한계를 드러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메드가 추락하는 순간의 화면 구도가 매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르덴이 영화를 만들 때 리얼리티의 극대화를 위해 리허설 및 동선 연습을 장기간 반복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아메드가 떨어지는 장면이 프레임 하단의 지붕으로 인해 가려진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때 카메라는 아메드가 떨어지는 모습을 일부러 붙잡지 않으려는 듯 아주 빠른 속도로 프레임 하단을 향해 눈길을 돌려버린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화면 구성에 앞서 존재했던 건, 아메드의 위태로운 모습을 뒤에서 응시하고만 있는 수동적인 카메라의 눈이었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 운용은 묘하게 이중성을 띠는 듯하다. 이제 추락하는 구간의 이전 장면들도 살펴봐야 한다. 아메드가 지붕으로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자. 교정 센터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기에 사로잡힌 소년이 담당 교사가 방심한 사이 도망친다. 소년은 뛰어간다. 이때 카메라는 패닝만 하면서 멀어지는 아메드를 붙잡지 않다가도, 담을 넘어 착지하는 아메드의 모습을 잡기 위해 그 너머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 높은 곳을 향해 가는 소년을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카메라는 어느샌가 지붕 위로 끙끙대며 올라오는 아메드보다 먼저 그 자리에 위치한다. 최종 편집본의 <소년 아메드>에서 카메라가 소년을 따라가는 방식은 어딘가 의뭉스럽다. <소년 아메드>에는 인물의 내적 상태를 카메라와 마찰시켜 관객에게 체험을 유도하는 카메라, 흔히들 말하는 다르덴 초창기 영화가 경험시켜 주던 기적 같은 체험의 카메라 워크 같은 것이 없는 듯하다. 인물과의 거리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화법도 찾기 힘들다.


사실 <소년 아메드>가 줄곧 소름 돋는 장면들을 담아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영화는 아메드의 손에 꼭 쥐어진 칼이 사람에게 향하려는 찰나의 긴박한 공기를 관객에게 전달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대로 행동하는 아메드의 모습을 포착해왔다. 하지만 카메라는 어째서 충격적인 이벤트의 정점인 소년의 추락만큼은 의도적으로 은폐하는가. 이건 재현의 윤리와 결부된 문제일까? 소거와 부각에 관한 윤리 말이다. 하지만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으려는 차원의 도덕성을 적용한다면, 앞서 봤듯 아메드의 행적을 끈질기게 담아왔던 영화의 태도와 사뭇 상반된 논조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건 구조적인 모순일까.


그렇다면 카메라의 무력함부터 살펴볼 수 있겠다. 볼 수 있는 데까지만 보겠다는 카메라. 여기엔 가시적인 범위를 염두에 둔 채 관찰 가능한 영역만을 조망하겠다는 의도가 있다. 즉, 이 영화에서 아메드가 프레임을 벗어나는 순간들 혹은 구조물이나 장치로 인해 신체를 감추는 순간들은 분명 카메라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실 다르덴 영화가 익숙한 관객이라면 그들의 기존 핸드헬드에서 산출되는 이런 수동적 면모에 익숙하다. 롱테이크를 곁들인 <아들>(2002)의 핸드헬드가 주체와 관찰자 사이를 오가면서 진정성을 표상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소년의 신체에 바짝 붙은 듯한 카메라 워크가 돋보이는 <소년 아메드> 역시 다소 삐걱거리긴 해도 다르덴 영화 세계에 결국엔 편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 상황은 카메라의 적극성이 발동될 때 생긴다. 나는 카메라의 권능이 충분히 감지되는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뒷덜미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함부로 인물의 내·외적 상황을 재단하려 들지 않았던 다르덴의 카메라는 <소년 아메드>에서 그 한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숏들의 병치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해결해야 할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이렇게 볼 수 있겠다. <소년 아메드>는 영화 내내 독특한 구조가 반복된다는 점으로 인해 카메라의 양가성이 발현되는 영화가 된다. 소년의 행동을 계속 놓칠 수밖에 없다며 카메라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과 인물의 동선을 재단하는 듯 카메라의 위치 선정을 숨기지 않으려는 것. 두 가지 측면에서 양가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셈이다. 첫 숏과 두 번째 숏을 컷하는 방식부터 그러하지 않았나. 아메드가 이네스 선생님을 난처하게 만들던 학부모 회의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년을 따라가지 않으나, 다음 숏에선 버스에서 내리는 아메드를 정류장에서 미리 기다린 채 맞이한다. 아메드의 뒷덜미를 잡으면서 소년과 함께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을 위해서 장면을 찍어내고 편집하려는 초창기 다르덴 영화스러운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에서 아메드의 특징적인 움직임이 동반될 때 카메라의 양가적 면모가 드러난다. 게다가 이런 특징이 아메드의 행적이 서사적으로 유의미해지는 순간에 주로 포착된다는 점에서, 영화를 지배하는 카메라 운용의 문제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접속 기회 차단


카메라의 양가성은 영화가 내비치는 인상을 뿌옇게 만든다. 이때 <소년 아메드>가 도덕과 윤리를 논하려는 소망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진정한 문제는 그런 소재를 심도 있게 다룰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영화가 스스로 윤리극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어떤 텍스트에서든 윤리를 테마로 다룰 때 중요한 건, 인물의 고뇌에 따른 선택이다. 그리고 윤리가 어떤 기준과 근거에 속박되는지를 가늠해야 한다. 이는 곧 행위자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책임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인물을 둘러싼 환경 요소들이나 주변인들과의 상호 작용에 있어서 선택을 좌우하게 만드는 순간들도 고려해야 한다. 영화가 윤리를 다룰 때, 관객에게 도달하는 민감한 질문들은 앞서 살핀 요소들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그래서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산드라의 최종 선택에 이견을 달 수는 있어도, 그녀가 그간 내렸던 판단들을 경유해 그 선택이 어떤 과정에서 비롯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언노운 걸>의 제니를 사로잡은 죄책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녀가 선택한 윤리적 도정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주변 이웃과의 대면으로 이어지는 노정 가운데 그녀의 숭고한 내면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동원할 수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소년 아메드>에서 아메드의 자취를 좇는 일은 두 영화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풍기는 작업이 된다. 우리에게 아메드의 행동은 질문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아메드를 위해 조직된 주변 환경 변화가 어쩌면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건 아닌가. 창작자가 매달리는 윤리 담론이 아메드를 거쳐 관객에게 정제된 형태로 도달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이때 <소년 아메드>의 카메라가 줄곧 소년의 신체에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짚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육체에 관한 이야기다. 아메드의 몸에 주목하는 카메라는 관객이 개입할 여지를 남긴다. 몸의 언어와 이미지는 누구든 손쉽게 몰입 가능한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관객은 얼굴과 손을 씻는다든가 칼을 휴지로 감싸거나 열심히 달리는 아메드의 행위를 반복해서 목도한다. 소년의 움직임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 자체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특징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관객은 아메드의 내면에 동화될 수 없다. 가장 몰입하기 쉬운 육체적 표지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음에도 관객이 결코 아메드와의 접속에 실패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영화는 애초에 아메드의 심리를 파악할 기회를 차단한다.


계속해서 영화를 곱씹어 봤을 때, 이러한 방식이 인물의 주체적 행위에 내포된 의미를 관객에게 함부로 전이시키지 않겠다는 감독의 신중함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해당 전략은 관조 및 판단 유보의 탈을 쓴 위장술이 되는 건 아닐까. 다르덴은 자신들이 직접 구현한 인물을 끝내 헤아릴 수 없었다는 한계를 오히려 그들의 기존 문법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메드는 영화 속에서 아주 강박적인 자세로 정해진 곳으로 달려가거나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그를 놓쳤지만, 애초에 아메드가 갈 곳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소년의 움직임엔 일말의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가 한계를 표상하는 경우, 관객은 안 그래도 파악하기 힘든 아메드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기존 다르덴 영화와 비교했을 때 <소년 아메드>의 이질감을 증폭하는 원인은 카메라 운용과 서사의 호응을 살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메드에게 부여된 서사적 설정(미성숙한 광신도)은 소년의 행적에 관한 당위를 확보해주므로, 관객이 그와 밀착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갖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오인으로 인해 관객들은 자신이 아메드와 영영 동화될 수 없으며, 그가 어디로 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고 예단하고 만다.


소년과 동화될 수 없는 관객은 다른 선택지를 찾아 나선다. 그의 내면을 탐색할 수 없다면 주변 환경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판단 과정은 물론 소년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레 아메드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에 집중하려 든다. 영화 속 대화 장면은 대개 숏을 쪼개 각 인물을 숏/역숏의 구도로 배치한 구성이 아닌, 말하는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담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소년의 얼굴에서 좀처럼 감정을 읽어내기 힘들다는 점이 여전히 관객과 아메드 사이의 관계 형성을 방해하지만, 이런 구도에서는 주변인의 발화가 아메드에게 미치는 영향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메드와 엄마의 면회 장면을 떠올려 보자. 소년은 엄마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이어간다. 엄마는 아메드를 바라보지만, 아들은 엄마를 응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메드가 고개를 드는 순간이 있다. “혹시 형이 무슨 얘기 했어요?”라며 질문을 던질 때다. 아메드의 관심사는 오로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이맘과 형 등과 이어진 관계의 안위다. 그러니까 아메드에겐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노력도, 현재 상황에 대한 반성도 그 어떤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대화를 이어가는 아메드가 이네스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즉각 고개를 들어 반응한다는 점에서, 이 미성숙한 소년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소년 아메드>의 태생적 맹점이 이후 다시 한번 발견된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 아메드는 엄마와 대화를 나눈 뒤 개선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그건 바로 체육 시간의 달리기 장면부터 시작된다. 뜀박질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아메드는 담당 교사에게 농장에서 절 다시 받아주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건 변화의 징후다. 다음 장면에서 아메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네스 선생님과 만나기 위해선 두 번의 상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정보를 알린다. 기묘하게도 엄마와의 대화 뒤에 붙은 이러한 장면들이 아메드의 심리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글에서 전술했던 양가성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몇몇 편집점을 통해서도 관객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하필 대화 이후에 붙은 저 두 개의 신으로 인해 관객은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되지만, 이후 영화는 극도로 태연하게 아메드가 화장실에서 몰래 칫솔을 가져 나와 바지춤에 숨기고 칫솔대를 바닥에 갈아 무기화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관객은 아메드의 내면에 접속하지 못한 채 좌절하게 된다. 이러한 플롯의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서사가 향할 곳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관객은 계속해서 영화의 서사와 그 속의 아메드가 처한 상황을 오가면서 오인할 운명에 놓인다. 오인된 지각은 편견과 예단을 불러오며, 영화 내내 관객은 이런 줄타기를 통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관객이 마주하는 곳은 딜레마와 질문으로 둘러싸인 윤리극 현장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을 단 하나의 종착지로 가도록 부추긴다.


반복하자면 영화엔 양가감정이 존재한다. 불가해한 아메드를 향한 다르덴의 회의감과 아메드를 윤리적 주체로 활용하기 위한 다르덴의 소망이 공존하는 셈이다. 인물의 선택이 윤리적 승화로 이어지게 하려는 다르덴의 기획은 따라서 이 양면성을 희석하기 위해 기존의 인장(핸드헬드 등)을 활용해서 아메드를 좇는 카메라의 한계를 표출하려 들지만, 한편으로는 서사 내 선택지의 빈곤함으로 인해 정해진 곳으로 인물을 강제로 이끌어야만 하는 딜레마에 놓이고 만다. 영화 내내 불가해한 인물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하겠다는, 인물이 윤리적 주체로서의 여정에 몸담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르덴의 의지가 포착된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기존의 서사를 엎고 각본을 새로 쓰거나 인물을 재구축하는 고된 작업에 착수하는 대신 너무나 손쉬운 길을 택한 것 같다. 그것이 바로 관객에게 펼쳐진 결말부의 추락이 아닌가. 이 추락은 <자전거 탄 소년>(2011) 속 시릴의 추락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게 <소년 아메드>는 숭고한 윤리의 탐색지를 곱씹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공포와 광기만이 나열되는 현장이 된다.



윤리 실험?     


그렇다면 질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년 아메드>가 소년의 내적 성장 혹은 윤리 의식 고찰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논하는 영화라는 점을 긍정할 수 있을까? 적어도 다르덴만큼은 이 영화를 그들이 매달려 온 인간 탐구의 연장선이자 확장판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 지점에서 새삼 2010년대 이후의 다르덴 영화에서 그들의 인장이라 불리던 핸드헬드의 당위성이 헐거워졌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인물과의 물리적 마찰을 전제로 카메라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 채 집요하게 따라가기만 하던 그들의 고집. 하지만 영화 전면에 자리하던 고집스러운 철학이 하위 단계인 서사적 연료로 편입되면서 특유의 인장이 만들어내던 기적 같은 체험이 더는 생성되지 않는다. <로제타>(1999)의 핸드헬드와 <내일을 위한 시간>의 그것은 작동 원리에서부터 명확하게 다른 층위에 놓이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 탄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 <언노운 걸>이 도달하는 윤리적 선택의 숭고는 핸드헬드가 아닌 서사에 빚을 지고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구축된 플롯이나 인물들과 같은 서사 요소 말이다.


다시 말해 2010년대 이후의 다르덴 영화는 아주 명백한 윤리 실험장처럼 느껴진다. 변곡점을 <자전거 탄 소년>으로 잡은 이유 역시 서사 때문이다. <로나의 침묵>(2008)에선 서사적 주체인 로나의 의중이 쉽게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자전거 탄 소년>에선 구축 의도가 뻔히 보이는 사만다가 시릴에게 미치는 영향이 명확히 감지되지 않았나. 다르덴은 인물을 가공하고 상황을 가정한 뒤 윤리 실험 서사를 전개한다. <자전거 탄 소년>은 사만다라는 전지적 존재를 통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 시릴의 교화 가능성을 묻는다. <내일을 위한 시간> 속 산드라가 회사 동료들을 찾아가는 이틀간의 노정은 균일한 밀도로 진행되는 서사에 따라 선택과 딜레마의 문제가 일사불란하게 나열되는 도덕극이다. <언노운 걸>은 이름 없는 타자를 향해 숭고의 손길을 뻗치는 의사 제니의 죄책감을 서사의 동력원으로 설정한 뒤 공동체 윤리의 실현 가능성에 관해 묻는다. 이렇듯 세 편의 영화에선 그들의 초기 영화를 지배하던 핸드헬드가 주는 효과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무게추를 <소년 아메드>로 옮길 때가 되었다. 이 영화는 다르덴 표 윤리 실험의 확장판이 될 수 있을까. 단도직입으로 내 생각을 밝히자면, <소년 아메드>는 윤리 실험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윤리 실험처럼 보이길 원한다. 그런데 다르덴이 자신들이 매달리는 인물에 관해 심도 있게 탐색할 수 없었다는 솔직한 심정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게다가 이 영화를 통해서는 종교에 관해서도 유의미한 논의를 도출해내기 힘들다. 세뇌된 아메드의 섬뜩한 면모를 나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만으로는 영화를 넘어 산재한 현실 속 이데올로기에 관해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또한, 벨기에 내의 무슬림 커뮤니티를 둘러싼 현실적 분위기를 영화에 담아내서 핍진성을 확보하는 묘사들만으로는 여러 분파로 나뉜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절대로 집약해서 묘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년 아메드>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화엔 과거 다르덴의 흔적들이 망령처럼 떠돌고 있을 뿐이다. 물론 현재 다르덴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테마들이 묻어나온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아메드를 보듬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광신에서 비롯된 집착은 사람을 어디까지 피폐하게 만드는가. 다르덴은 진정으로 이 지점에 주목했을까. 칸 영화제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제시하고 싶었던 화두는 ‘인간은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다르덴은 아메드를 관통하는 삶의 요소를 찬찬히 응시하지 않는다. 그가 특정 신념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만을 부각하려 든다. 극 중 엄마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아메드가 광신도의 삶을 살기 이전에는 또래들처럼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다. 영화는 아메드에게 퇴적된 삶의 요소들에 관심이 없다. 즉, <소년 아메드>는 그의 삶에 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년 아메드>는 맹신에 사로잡힌 자가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회복하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인물과 멀어질수록 윤리 실험은 성립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 영화는 구원과 용서를 논하던 기존 다르덴의 영화와는 자연스레 다른 층위에 놓인다.


그래서 이네스 선생님을 향한 아메드의 사과를 속죄라는 이름의 윤리관 변화로 읽어내선 안 된다. 아메드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뒤 내적 변화를 겪었으리라 추정하는 의견들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아메드의 입에서 ‘알라’ 대신 ‘엄마’가 터져 나온 구간도 이 변화를 극적으로 가공한다. 그런데 다르덴은 『씨네 21』 1267호에 수록된 서면 인터뷰에서 “아메드가 이네스 선생님을 죽이려는 생각을 멈추고 현실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은 방법은 말 그대로 아메드를 추락시키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이건 죽음과의 직면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는 무력감의 고백이다. 따라서 <소년 아메드>의 산발적인 소동은 소년의 내밀한 심리를 따라 기획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저 아메드의 육체를 어딘가로 몰고 가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면서도 소년을 서사에 묶이지 않게 하려는 소망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기에, 그들의 기존 영화들처럼 카메라의 한계가 노출되는 순간들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이때 관객의 지각은 늘 오인당하면서 소년과 접속하지 못한 채 멀어져만 간다. 그래서 관객은 소년을 윤리적 주체가 아닌 장기나 체스의 말처럼 인식하게 된다. 아메드는 어쩌면 광기의 무대 위 텅 빈 껍데기 인형이 될 운명에 처한 셈이다.


이 공포의 현장에선 역설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험장이 존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소년 아메드>는 설파의 성격을 띤 교조적인 영화가 되는 건 아닐까. 그저 아메드의 언행을 통해 광신의 위험성만을 부각하고만 있다. 소년의 윤리 의식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혹은 소년을 구원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혹은 소년의 언행을 추동하는 진정한 원인에 관해 생각할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문제의식만 강조될 뿐, 그 어떤 열린 가능성도 없다. <로제타>가 다르덴 특유의 인장을 통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자연스럽게 환기하는 데 성공한 영화였다면, 서스펜스로 가득 찬 <소년 아메드>는 사회문화적 이슈를 염두에 둔 스릴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소년 아메드>는 <프로메제>(1996)나 <아들>과 같은 층위에 놓이기 힘들다. 현실과의 접점을 탐구하는 작업이 아메드를 따라가는 핸드헬드로는 기획될 수 없다. 또한 <소년 아메드>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나 <언노운 걸>과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기에도 어렵다. 윤리 실험이 아닌 사회 문제 고발극과 같은 구성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소년 아메드>는 어쩌면 현실과의 접점을 탐색하는 시도를 포기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여전히 뇌리에 남는 것은, 어딘가에 고립된 채로 존재할 법한 수많은 ‘아메드들’이다. 소년의 선택지를 제한했던 다르덴의 회의감은 이해와 포용의 영역을 벗어난 근원적 공포감에 가깝다. 이로써 그것은 ‘윤리 실험을 가장한 사회 고발극’의 주재료가 되고야 만다. 애초에 다르덴은 종교의 극단적 맹신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을 전제하고 아메드의 동선을 가늠한다. <소년 아메드>의 작법은 인물을 세심히 어루만지던 지난날의 그것들과 분명히 다르다.


다르덴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간극을 최소화하려는 고유한 제작 방식으로, 개인의 윤리와 사회 구조의 민낯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를 이어왔다. 그러한 여정 가운데 근작들에는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제작된 그들의 영화는 보편적인 윤리 테마를 전면에 내세운 탐색지대처럼 기능하는 듯하다. 다르덴의 영화 속 타자들의 이야기가 점점 영역을 확장하는 듯 느껴진다. 이런 맥락에서 관객은 다르덴의 질문과 만난 뒤 각자의 답을 도출하려 든다. 그러나 <소년 아메드>에 이르러서, 다르덴은 관객에게 질문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엔 유럽 사회가 직면한 공포가 소년의 광기로 치환된 현장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르덴의 영화답지 않은 무력감을 내뱉고 있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듯하나 인간 문제와 동떨어져 보이는, 묘한 이질감으로 둘러싸인 <소년 아메드>는 다르덴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변화를 마다하지 않던 그들의 세계가 잠시 방황의 늪에 진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다르덴이 예전처럼 인간 존재에 밀착한 채 윤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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